배움의 집
70년대 후반 저녁마다 해를 등지고 덕수궁돌담길을 걸었다. 아니 달렸다. 숨이 턱에 차오르게 달려 돌담길 끝에 우뚝 선 정동교회 배움의 집에 드나들었다. 배움의 집은 중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이었다.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드라마 <6남매>의 둘째이자 장녀 숙희처럼 살았다. 그래선지 두고두고 회자된("똑 사세요"발음으로)배우 장미희 씨 보다 숙희에게 애정이 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지영보다 엄마 미숙에게 공감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배움의 집 선생님은 대학생들이 운영하던 대부분의 야학과 다르게 정동교회 신도 중 전, 현직 교사들(당시 소개를 그렇게 했다)로 구성되었다. 학생은 10대 중후반으로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낮동안 일하고 공부하겠다고 밤길을 달려온 열정 있는, 옷차림은 초라했지만 눈빛은 똘망똘망 빛나는 아이들이었다.
나는 열네 살부터 섬유공장에서 일했다. 전태일을 떠올리면 알겠지만 당시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대부분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하여 저녁 7시까지, 수출 날짜가 다가오면 9시 야근, 11시 야근, 철야(새벽 3시), 올나이트(아침까지)를 하곤 휴일은 오직 한 달에 두 번 첫째, 셋째 일요일이었다. 9시 야근엔 비닐에 든 빵 하나, 11시 야근엔 밥이 나왔다.
사장님은 이북사람이었는데 십 대 중 야학에 다니는 사람에겐 이른 퇴근(5시 30분)을 허락해 주었다. 그 시간만큼 월급은 줄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마운 분이었다.
그렇게 소망하던 배움을 위해 저녁이면 버스를 타고 덕수궁에 내려 숨이 턱에 닿도록 덕수궁돌담길을 달렸다(기억에 의지해 쓰다 보니 일기를 쓰지 못한 게 후회된다).
교실은 벧엘예배당 한 공간이었다. 이 시절 잊지 못할 기억 하나가 있다. 그날도 평소처럼 수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보다는 둔탁한 소리였다. 선생님이 나가더니 갑자기 분주해지셨다. 한 여학생이 수업에 늦어 달려오다 닫힌 유리문을 못 보고 그대로 돌진했던 것이다. 오래전 일이라 그 친구가 병원에 간 것만 뇌리에 남았다.
일 년 동안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 진학을 도왔던 배움의 집 수료생에 나는 없다. 겨울이 되면서 야근이 잦았고 눈치가 보여 수업을 거르다 보니 따라가기 어려워 그만둔 것 같다. 홀로 애쓰다 지쳐 놔 버린. 미래를 꿈 꾸며 달린 십 대 내 첫 야학은 그렇게 끝났다.
사람들이 청춘을 회상하며 걷는 덕수궁 돌담길을 나는 정동교회를 떠올리며 걷는다. 돌담길 끝 배움의 집을 향해 달리던 어린 소녀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