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말씀
전후 일본 신문들은 1955년의 “종전 10주년 특집”을 시작으로 새로운 전통을 수립한다. 이른바 “ 8월 저널리즘”이다. 8월이 되면 특히 신문지면들은 8월 저널리즘 메뉴로 넘친다. 신문 지면을 전쟁과 관련된 각종 칼럼과 사설, 화보로 장식한다. 그 내용들은 ‘전후를 다시 읽는다’ ‘전후 의식으로부터의 탈각’ ‘종전기념일에 생각한다 왜곡되는 신 일본의 성격’, ‘포츠담 선언을 다시 읽는다’ 등이었다. 사회면들도 ‘종전일 그 동안 무엇이 달라졌나’ ‘그로부터 10년’ 류의 기사들로 채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종전 관련 사진들을 소개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많은 사진들은 옥음방송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옥음방송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남태평양의 일본군 포로들, 궁성 앞에 엎드린 시민들, 집단 라디오 청취 후 고개를 숙인 청취자들, 군수 공장에서 눈물을 훔치는 정신대원들……
이로써 전쟁의 끝은 연합국 앞에서의 항복 조인식이 있었던 그 날이 아니었음을 신문들은 강조한다. 천황의 목소리 즉 옥음방송이 전쟁의 끝을 알리는 지표였음을 주지시킨다. 칼럼, 사설, 증언, 사진은 서로를 인용해가며 그 날 ‘옥음이 있었고, 비로소 전쟁이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못 박는다. 항복 장면들을 기억에서 몰아내고, 성스러운 결단으로 백성을 구한 천황의 옥음만이 종전의 기억에서 도드라지게 만든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므로…….’
종전의 기억을 8월 15일 옥음 방송으로 못박는데는 1950년대의 라디오도 한 몫을 했다. 소리가 자본주의의 좋은 상품이 된다는 사실을 그 때부터 확실하게 알았던 탓일까. 1953년부터 NHK 라디오는 본격적으로 “815 종전 기념일” 편성을 시작했다.
7월에 주로 이뤄지던 《우란분회 법요》는 8월로 그 편성 자리를 옮겨갔다. 연합군 사령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종교 프로그램을 편성할 요량으로 끼워넣던 크리스트교 프로그램은 이 즈음에 이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불교행사인 우란법요, 그리고 8월 15일 양력 오봉을 전후한 봉오도리 방송의 중계는 전국의 NHK 지방국을 네트웍으로 묶어 냈다.
각 민영방송들도 이에 대응하는 편성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8월 15일 되면 옥음방송과 관련된 인사들의 회고담이나 당시의 청취 모습을 회상하는 프로그램들로 편성했다. 전쟁 전 8월에 중계되고 편성되던 고시엔 고교야구대회도 종전 이후에는 자숙의 의미로 중단되었으나 곧 재개되었고, 불교행사, 봉오도리, 종전기념방송 등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전쟁 전의 일본의 8월 풍경을 전후에 재연해냈다.
편성이라는 형식을 통한 전쟁 전과 후의 연결을 완성해갔던 셈이다. 라디오를 통해서 8월 더 정확하게 말하면 8월 15일은 전쟁이 마감된 날로 기억되면서도 늘 전쟁 혹은 전쟁 이전과 연상되는 날로 각인되고 있었다. 그 같은 흐름 속에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려준 9월 2일 미주리함에서의 항복 조인식 장면은 끼어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망각의 강에 줄을 대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는 말씀이 없었으므로…..’
들었으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신문이나 라디오의 “종전10주년 기획”과 거의 시기를 같이 해 역사 교과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옥음 체험을 강조했다. 연합군 사령부의 통치 하에서는 얼굴을 내밀지 못했던 용어, 사진, 내러티브들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 이후에 새로운 검정 교과서들을 통해 선을 뵈기 시작했다.
옥음방송이라고 직접 칭하지는 않았지만 성스러운 결단에 따른 방송, 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언급들이 등장했고, 그로써 전쟁이 마무리되었다는 식의 내러티브들이 등장했다. 어린 학생들의 회고가 역사 증언으로서 교과서에 등장했지만 대체로 회상 중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선택되고 있었다. 교과서는 국민이 안심하고 이미지화할 수 있는 평균적이고 표준적인 ‘회상’ 만을 역사로 채용하고 있었다.
무수히 양산된 옥음 체험 중에서 교과서는 표준적인 체험을 기술할 뿐이었다. 이러한 ‘1955년 체제’의 교과서 정통성 위에 사람들은 스스로의 말로 ‘자유스럽게’ 종전 체험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당연하게도 그 회상은 교과서 기술을 뛰어 넘지 못했다. 교과서의 역사 기술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 순간이며 사람들의 기억을 장악하게 된 결과다. ‘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새롭게 기억이 구축되고, 선택적 망각이 일어나면서 전쟁 시 사망자들의 지위에도 변화가일어나기 시작했다. 1956년 8월 15일에는 예전 군인들의 사상 단체인 일본향우연맹(日本鄕友連盟)이 일본유족회(日本遺族会), 신사본청(神社本廳)과 함께 “종전 시의 군관민 자결자” “전쟁 재판의 형사자, 옥사자 및 불법 억류 중의 사망자
” 등을 제사지내는 "순난제영혼(殉難諸靈魂) 현창 위령제”를 거행했다.
그 다음해 1957년에는 제사지내는 신의 범위를 “전화의 비운에 스러진 남녀노소 전부”로까지 확대하여 “대동아전쟁 순국 영령 현창 위령제”가 되었다. 이어 1958년부터는 중의원 의장을 제사(大祭) 위원장으로 하는 “대동아전쟁 순국자 현창 위령제”가 항례화 된다. 이러한 국가 위령제에 직접 언론이 관여하기도 했다. 이어 1969년 자민당은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를 목표로 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74년까지 동 법안은 다섯번이나 상정되었지만, 야당의 심한 반발에 의해 모두 폐안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 유족회’와 자민당은 8월 15일에 수상의 공식 참배를 항례화 하여 실질적으로 국가가 보호하고, 운영하는 실현을 꾀하려 했다.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도조 히데키 외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함으로써 공식 참배는 정치색을 띠는 사건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제 종전기념일에 수상이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일은 도쿄 재판 판결의 의미를 부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전과 후를 매끄럽게 연결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은 귀신도 편케 하리니…….’
1982년 4월 13일에는 8월 15일을 ‘전몰자를 추도해 평화를 기원하는 날’로 제정하기로 각의 결정되었다. 또 이 해 6월에는 중국과 한국이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에 항의하는 역사교과서 문제가 발발했다. 이 해의 “8월 저널리즘”은 역사교과서 문제를 의식하여 전쟁 책임 문제나 반전 반핵(反核)을 중심으로 하는 테마를 다루었다.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 등 시민운동 그룹은 기념일 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이렇게 해서 8·15 종전기념일은 “신들의 분쟁” 무대가 되었고, 제정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같은 논쟁으로 인해 최대의 홍보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8월 15일을 종전으로 잡은 기념일 선정은 이미 미디어와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홍보 효과는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즉, “8·15 종전”을 고집하는 한, 아무리 이웃 국가들이 종전기념일이 일본 중심적이고, 일본 내부의 관점을 지녔고, 그 날 야스쿠니의 참배는 전쟁책임의 회피라고 비판해도 비판 그 자체가 기념일 이벤트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특히 일본이 전쟁 전과 후를 연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한 비판 조차 일본 내부가 더욱 강한 연대를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되는 일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말씀은 세상을 하나로 만들지니……’
일본은 전후 55년 체제 이후 8월 15일 천황의 라디오 방송 즉 옥음방송을 신화화해왔다. 국제적 공인 종전일인 9월 2일을 일본에서 기억하며 그 날을 반성의 날로 하자는 목소리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간혹 그를 언급하는 역사 교과서가 있긴 하지만 그 목소리는 대중적 기억을 압도하지 못한다. 옥음방송일을 종전기념일로 하고, 그 기념일에 정치적인 강박관념을 덧 붙이는 일을 두고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기억을 상실할까봐 불안해 하는데서 유래하는 역사 왜곡이다. 전후 일본의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은 그 무더웠던 8월에 겪었던 체험들의 사라짐을 걱정해왔다. 사라지는 것 뿐만 아니라 후 세대들에게 계승되지 않으며 후세대들의 심성 속에서 재 생산되지 않음을 걱정해왔다. 불안, 우려, 걱정 그 모든 것들을 8월 15일로 수렴했다. 그 날이 결코 풍화되지 않도록 일본 언론은 단단히 붙잡아 매어 단속하려 했고 전후 일본의 55년체제가 와해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말씀은 빛이고, 진리이니……..’
전후 일본 미디어의 선택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연합군 사령부(GHQ)의 일본 통치는 마감되었다. 어떤 이는 그 날로 일본이 진정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종전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종전 이후 강화조약 발효까지의 기간을 놓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분주했다.
하지만 군부 파시즘의 사회에서 민주화된 사회로 변화되었음을 인정하려는 적극적 의지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일본의 운명이 남의 손에 맡겨진 굴욕의 시기로 파악하는 듯 했다. 일본으로서는 그 굴욕을 지우는 작업들이 필요했다.
한국전쟁 이후 가파른 상승곡선을 탄 경제성장으로 일본은 이미 전쟁 전의 자신감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를 기반으로 ‘떳떳한 일본’ ‘불가피했던 전쟁’ ‘대동아 공영을 위한 전쟁’이었음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역사와 기억을 선택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많은 자료들이 필요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자료로 선택된 것이 바로 옥음방송이며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역사와 기억의 선택 작업으로 인해 8월 15일자 천황의 옥음은 전쟁의 끝을 알리는 소리로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전쟁 후의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소리로도 받아들여졌다. 옥음은 전쟁의 끝이면서 전후(戰後)의 시작으로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천황의 옥음을 전쟁의 끝과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받아들임은 전쟁 전과 전행 후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전쟁 전후사의 연속성 구축 작업이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그 작업의 하이라이트 시기를 1955년으로 파악한다. 소위 전후 일본의 55년 체제와 함께 역사와 기억의 55년체제도 구축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1955년 10월에 사회당 내 좌우 파벌이 통합 했고, 다음 달인 11월에 민주당과 자유당이 통합을 해 자유민주당(자민당)이 만들어졌다. 미소 냉전 시스템을 일본 국내정치에 투영시킨 형태로 여야체제가 이뤄진 셈이다.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자유민주당과 3분의 1을 차지하는 사회당과의 안정된 양립체제 이른바 “55년체제”가 성립되었다. 전후 좌우 이념을 대변하는 양당은 8월 15일 옥음방송이 있은 날을 두고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우파는 그날로 ‘평화의 날’이 시작했다며 일본의 원폭 피해를 강조했다.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잊고 원폭의 피해자임을 드러낼 욕망이 강했던 탓일 터이다. 좌파는 그날을 천황으로 부터 민중에 정치권력이 넘어온 ‘혁명의 날’로 보고자 했다. 8월 15일에 부여하는 의미는 각기 달랐지만 좌파와 우파 공히 8월 15일이 종전일임에 합의를 본 셈이다. 정치의 55년체제와 함께 “국민적 기억의 55년 체제”도 구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