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바로 그 날의 사진을 찾습니다.
“여러분 기립해주기 바랍니다. 중대 발표입니다.”
와다 신켄(和田信賢) 방송원의 긴장된 목소리였다. 그 긴장의 시간은 정확하게 1945년 8월 15일 정오 시보 직후에 나왔다. 이어 시모무라 히로시(下村宏) 정보국 총재의 방송 내용 설명이 있었다. “천황폐하..... 이제부터 삼가 옥음을 방송해드립니다.” 곧 이어 기미가요가 연주되었다. 전날 녹음되었던 일왕의 4분 37초 짜리 포츠담 수락 선언 즉 종전조서가 발표되었다.
그런 다음 다시 기미가요가 방송되었다. 와다 방송원이 마이크를 잡고 “삼가 천황폐하의 옥음방송을 마칩니다”라고 종료 선언을 했다. 그리고 이어 와다 방송원은 4분 37초 짜리 방송에 담긴 내용을 설명했다. 그 해설에 이어 종전조서는 다시 낭독되었고, 국민에 대한 당부, 그 동안의 경과, 어전회의에서 있었던 내용의 설명 등 그날 일왕의 방송은 37분 30초 동안 지속되었다.
그 날 8월 15일자 조간신문은 모두 12시 이후에 배달되도록 지시되어 있었다. 조간이 석간으로 바뀐 것이다. 이미 그 전날인 8월 14일 오후에 종전조서의 사본이 신문사에 건네졌기 때문에 정오 방송 이후에 신문을 배달하도록 사코미주 츠네하시(迫水常久) 서기관장이 단단히 조처를 해두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8월 15일자 아사히 신문에는 그 방송을 듣고 땅에 엎드려 우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등장한다. 아사히 신문역사를 담은 회사 역사책에는 쓰에쯔네 타쿠로(末常卓郞) 기자가 정오에 그 장면을 목격하고 30분만에 원고를 완성하여 신문에 실었다고 적고 있다. 30분 동안에 4백자 원고지 약 6매 정도를 적어 인쇄부로 넘겼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지금에는 누구도 그 원고가 마치 본 것처럼 미리 적어 두었던 예정원고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날의 장면을 담은 사진도 같이 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진 안에는 “궁성 앞 광장 앞의 국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정오가 넘은 시간에 사진을 찍은 다음 같은 날자 신문에 실었다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 미루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사진 안의 주인공인 하나다 쇼우조우(花田省三)이 1975년에 나타나 놀라운 증언을 남긴다. 사실 그는 하루 전인 8월 14일 사업차 아오모리 현에서 도쿄로 온 김에 궁성을 둘러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팔에 완장을 두른 카메라맨이 땅에 엎드린 포즈를 취할 것을 요청했고, 그 다음날 사진을 받기로 약속한 후 포즈를 취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진이 다음 날 아사히 신문에 옥음방송을 듣고 우는 “궁성 앞 광장 앞의 국민들”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고 증언했다. 예정기사에 맞춘 포즈 사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날 아사히신문에 실렸던 기사나 사진은 나중에 밝혀진 진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그날 1945년 8월 15일의 기억을 압도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그런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반복되는 드라마, 다큐멘터리, 회고담, 인터뷰 등등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패전이 아닌) 종전이었고, 종전을 맞이하면서도 (비인도적인) 원자탄 탓에 희생을 당했다는 생각을 지우지 않는다. 그래서 패전의 부끄러움이 아닌 종전을 맞이하는 희생자로서의 아픔을 가슴깊이 새긴다. 원래 8월 15일이 이미 죽은 혼령과 함께 하는 일본식 추석(우란분회, 오봉)임을 감안한다면 종전의 날은 전쟁 중 죽음을 당한 혼령을 위로하는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이 비인도적 처사에 의한 희생이라는 사실도 포개진다.
그래서 그날 시작하는 아사히 신문사 주최의 코시엔(甲子園) 고교야구대회 중간에 정오 사이렌이 울리고 1분간의 묵념의 시간을 갖는다. 누굴 위한 묵념일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그 날 일본은 이미 예정되어 만들어져 있었던 기사와 사진을 자신들의 진정한 과거로 믿고 그 안에서 하나 됨을 찾고, 죽은 자를 세월의 희생자로 기억하며 살아가자는 뜻이리라.
여기 조선 땅 경성의 1945년 8월 16일의 사진 넉장이 있다. 한 장의 사진은 매우 익숙한 사진이고 다른 세 장은 낯설다. 선방(선방)이란 플래카드를 든 무리가 서울역에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위 사진). 선방은 조선해방의 줄임말이거나 해방의 오기일 수도 있다. 멀리 조선독립만세, 민주정권수립 등의 슬로건도 보인다. 스펠링이 틀린 월컴 글자도 선명하다.
이 플래카드를 담은 사진은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오랫동안 해방 당일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우리의 기억을 좌우해왔다. 그런데 같은 플래카드가 다른 장소에서 등장한 사진을 하나 입수하게 되었다. 사진은 특정 장소 안인 것처럼 보인다. 위에서 목격했던 사진이 등장한다.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것은 위나 아래나 다름이 없다. 멀리 건물이 보이지만 쉽게 가늠이 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 공간은 어디일까. 언제쯤에 찍힌 사진일까.
그 장소와 시간에 대한 의구심이 있던 차에 4번째의 사진을 접하게 되었다. 네 번째의 사진은 여운형 선생이 해방 다음날인 16일 대중연설을 위해 휘문학교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선생이 휘문학교를 들어서는 일련의 사진들을 모아 보았다. 옷차림으로 보아 같은 날자, 같은 시간임에 틀림없다.
여러 사료에 의하면 8월 15일 여운형은 총독부 정무총감인 엔도(遠藤)를 만났고, 일본인의 안전을 위한 약속을 하는 동시에 해방조선의 앞날을 위한 조건들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미 지니고 있던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바꾸어 발족시킨다. 다음날 그 사실을 알리고 해방을 위한 조선인들의 결의를 다지는 연설을 행하러 휘문학교로 들어서고 있다.
여운형이 연설을 하는 동안 안재홍은 경성방송을 통해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을 알리고 조선인들의 협조를 구한다. 이날 휘문학교에서 행해진 여운형의 연설 말미에 소련 해방군이 서울역으로 온다고 누군가 소리를 쳤다고 한다. 혹자는 여운형의 헤게모니를 견제한 공산주의자들의 루머 퍼트리기의 일환이었다고 말하고, 혹자는 엔도가 잘 못된 정보를 준 탓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연설 후 사람들은 서울역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첫 번째 사진에서 보여진 플래카드와 똑 같은 모양이 두 번째 사진에서도 보인다. 두 번째 사진이 찍힌 곳은 여운형이 등장하는 휘문학교의 배경과 거의 틀림이 없다. 유추를 해보자. 8월 16일 여운형의 연설이 있던 휘문학교에 그 플래카드는 분명 있었다. 그 플래카드는 여운형의 연설이 마칠 즈음해서 나온 루머를 따라 서울역 앞으로 진출했다. 오지 않을 소련 해방군을 맞이하기 위한 진출이었던 셈이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한 장의 사진은 조선의 8월 15일의 기쁨을 가장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서 남아 있다. 그와 연결되는 다른 두 장은 알려지지도 않거니와 혹 있음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연결을 지우면서 말이다.
이 세장의 사진은 조선 땅 1945년 8월 15일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8월 15일의 사진은 아직 찾지 못했다. 8월 15일 사진이라고 알려진 사진 대부분은 그 다음 날이거나 아니면 다른 날의 사진을 그날의 사진이라고 말한다.
여운형 등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8월 여름이지만 여운형은 2005년에 이르러서야 애국지사로 추서된다. 소위 좌파민족주의의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국가의 고집 탓이다. 그가 추서되었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사진들이 여운형을 비롯한 민족주의 좌파들의 기억을 다시 살려내지는 않는다. 여전히 그 공간은 무주공산의 공간이었고,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취하면서 질서가 잡힌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8월 16일 16,000여명이 감옥에서 풀려났음에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일본인에 대한 극렬한 보복이 없었던 것을 설명할 방도가 달리 없건만 여전히 그 공간을 비워두었고, 지금도 그 같은 시도는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해방의 순간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해방의 기운이 충만한 공간으로 기억되기 보다는 무언가 모자라고 불안한 결핍의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사히신문의 기사와 사진은 일본을 <희생자>로 동일시하게 하는데 일조를 했다. 그래서 일본은 사죄하지 않으며 자신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이웃들에게 눈을 흘리기를 반복하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은 늘 평화의 상징으로 환원되고, 덩달아 일본인들은 평화의 화신으로 변하고, 희생자로 변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에 토를 다는 이들을 평화를 원치 않으며 언제까지 금전적 배상을 원하는 무뢰한으로 받아들인다. 어찌 아사히신문의 기사 하나가 사진 하나가 그런 맘을 가꾸었으랴. 아사히신문은 그 과정에서 특히 일본의 55년 체제 이후 동력 엔진 노릇을 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의 모습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인류사적 죄를 저질렀다.
우리의 사진 해석은 해방되었지만 불안하고 부족한 해방, 즉 <결핍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사진에는 환희라는 기의가 들어있지만 다른 역사적 기의는 모두 트리밍되어 있다. 이 환희가 곧 고통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준비 단계의 사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사진은 늘 환희를 말하지만 결핍이라는 자국을 묻히고 있는 사진으로 읽힌다. 결핍의 자국 다음의 서사는 결핍을 메워주는 친구, 영웅의 등장일 수밖에 없다. 그 친구로 많은 민족지도자가 등장하긴 했지만 영원하기로는 미국을 따를 자가 없었다. 미군이 조선 땅에 진주하기까지는 앞으로 20여일이나 더 남아 있는 8월 16일의 사진에서 미국을 읽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결핍자>였다.
그 결핍의 콤플렉스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큰 힘을 발휘하며 ‘미국을 통한 한국의 교정’ ‘극악무도한 놈을 낳아 미국에 해 끼쳐 죄송한 한국’을 외치게 하고 있다. 결코 승리자가 되지 못했던 우리는 그 날 우리의 사진을 풍부하게 가지고 못 했고, 한 두 사진으로 역사를 진실과는 다르게 말하며 슬프게도 60 여 년 동안 <결핍>을 채색해 둔 탓이다.
이제 그 <결핍>은 우리에게 종용한다. “여러분 기립해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