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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진 Jan 22. 2021

1945년 8월 15일의 사진


1945년 8월 15일, 그 날을 찍은 사진을 찾습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 역사서에서 해방 공간을 상징하는 자리를 놓고 두 장의 사진이 경합한 적이 있었다 

(신주백, 2006, 64쪽). 이제 그 유효성을 잃은 것으로 짐작되는 한 장의 사진은 서울역 앞 군중을 담고 있다 

(사진 #1). 군중들은 '해방(鮮放)'이라 적힌 플래카드를 높이 들고 행진을 하고 있다. '조선해방(朝鮮解放)'의 준말인지 아니면 '해방(解放)'을 잘 못 적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북한의 해방 축하식 사진에도 '해방(鮮放)'의 플래카드가 등장했던 적은 있다. 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 '해방(鮮放)은 특정 정파에 의해 사용된 용어일 수 있다. 하지만 뒷받침할 만한 자료를 찾을 길이 없다.이 사진은 80년대 이전의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이들에게는 낯익다. '해방(鮮放)'이라는 글자가 그 기억을 더욱 새롭게 해주기도 한다.


해방 공간을 표상하기 위해 앞선 사진과 경합한 또 한 장의 대표적 사진이 있다(사진 #2). 사진은 서대문 형무소 앞 만세 장면을 담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정치범 등이 풀려나 만세를 부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진 속 내용이 모호했던 데 비해 이 사진은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들은 이 사진을 8월 15일 해방공간을 드러내는 대표 사진으로 대접하고 있다. 특히 2001년부터 시작된 제 7차 교과과정 개편으로 등장한 역사 검정 교과서들은 이 사진을 8월 15일의 상징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신주백a, 64쪽). 해방이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광복, 해방 운동을 한 탓임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절한 사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서울역 앞을 서성대는 군중의 사진보다는 훨씬 더 많은 해방 정보를 주는 것이기에 그를 대표 사진으로 선택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리고 점차 해방 보다는 광복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게 된 사회적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다(신주백, 2006b). 서로 경합하고 있지만 두 사진은 몇몇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주목받은 시점이 다르고 그 지위도 달라져 하나는 교과서를 통해 살아있고, 다른 하나는 사라졌지만 몇 개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공통점을 가질 뿐 아니라 두 사진은 시간적으로 이어진 한 계열의 부분이기도 하다. 두 사진이 담고 있는 시간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이 아니다. 그 다음날인 8월 16일이다. 


역사책, 광복 사진첩 등 많은 자료들은 이 사진들에 8월 15일의 서울 풍경으로 오식하고 있다. 그런 탓에 우리는 해방당일에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기억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진 #1>은 8월 16일 오후 1 시 이후의 서울역 앞 풍경을 담고 있다. 8월 15일 오후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한 여운형은 8월 16일 해방과 건준 발족을 알리는 이벤트를 준비한다. 8월 16일 정오 계동의 휘문학교 교정에서 해방 후 첫 대중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에 참석했던 군중 일부는 여운형의 연설 중 소련군이 입성한다며 서울역으로 향한다 (이정식, 2006, 278쪽). 


'해방(鮮放)'이라고 적은 똑 같은 모양의 플래카드가 휘문학교 교정, 그리고 서울역에서 연이어 등한 것으로 미루어 8월 16일 1시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은 북한의 해방 공간에서도 ‘해방(鮮放)’이라는 글자가 보였다는 점, 그리고 소련군을 맞이하는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방 후 이념적 성향이 드러나는 사진이기도 하다.


<사진 #2>는 8월 16일 오전 9시 경의 서대문 형무소 앞 풍경을 담고 있다. 전날 건준을 발족한 여운형은 정치범들의 석방 순간에 입회하였고, 그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이기형, 2005, 266). 경성보호관찰소장인 나가사키(長岐)는 여운형을 지속적으로 안내하거나 혹은 동행하는데 휘문학교 등장 장면에도 지근에 있었음을 여러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전날 여운형을 엔도에게 안내한 장본인으로 경성대화숙의 총수였는데 8월 15일부터 16일까지 여운형과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전날 총독부로부터 약속받은 바를 지키기 위해 나가사키가 계속 따랐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나가사키를 대동한 여운형은 이 사진 장면 이후 11시께 경성의 마포형무소 석방에도 입회한다. 그런 다음 계동 휘문학교의 정오 대중 집회에 참가, 연설한다. 


8월 16일까지 전국에서 석방된 사람은 만 여 명이 넘었다. 전국의 형무소, 구금소 등에서 석방된 정치범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지역 자치조직에 참가한다. 여운형이 청주의 사상범예방구금소에 동생 여운일(呂運一)을 대리인으로 보내 석방에 입회하게 한 것도 지역 조직화 준비 탓이다. 첫 번째 사진에 비해 두 번째 사진은 이념성을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 등장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없지만 두 번째 사진이 갖는 함의는 더 많아 보인다. 


항일과 민족 해방의 기쁨을 동시에 담고 있어 그 날의 감격을 전하기엔 <사진 #1>보다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범 석방 장면을 포착한 이 사진 다음 자리에 여운형의 휘문학교 대중집회 연설 장면을 놓고, 그런 다음 <사진 #1> 즉 서울역 앞 '해방(鮮放)' 사진을 위치시키면 그 일련의 연결이 바로 현재 수중에 남아있는 사진들로 꾸며볼 수 있는 8월 16일 하루의 경성 해방 풍경이다.


사진으로 요약해 본 해방 풍경은 분주함과 조심스러움을 담고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수근대는 민중들의 조바심을 읽을 수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천황의 포츠담 수락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얼마나 되었을까. 날로 변해가는 정세 속에서 라디오를 끼고 그에 귀를 기울이며 살았을 조선 내 일본인을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71.8%의 라디오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천황의 목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전날부터 예고 방송이 나갔고, 신문을 통해서도 중대 방송이 있을 거라고 예고했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친 일본인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약 3.7%만 라디오를 들을 환경에 놓여 있었던 조선인의 경우 라디오를 통해 해방되었음을 알게 된 사람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혹 천황의 옥음방송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금방 알아차린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41년 현재 일본어로 '보통 회화 가능자'가 전체 조선인 인구의 8.73%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41). 한문투성이의 황실어를 금방 알아낼 일본인조차 한정적이었을 정도였다 (고모리, 2003/2004).


소개한 두 사진이 담은 8월 16일 그 날 까지도 '태극기의 물결'은 보이지 않는다. "가끔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방송에 나와서 마치 제 눈으로 보기라도 한 거처럼 '8월 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치듯 휘날렸다'고 떠벌이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그날 서울 큰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로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안, 2005, 19쪽). 아직도 사태의 추이를 민중들이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진 #2> 속 만세 부르는 석방 인사를 구경하는 맨 앞 열의 사람들은 어쩌면 해방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거나, 다르게 받아들이고 전혀 다르게 그 날을 보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는 없으나 사진화보나 개인의 자전적 출판, 현 신문지상 등에 종종 등장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사진 #3). 이 사진에는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육성방송을 듣고 침통해하는 서울의 일본인들”

이라는 설명이 붙어 다닌다. KBS 광복 60주년 특별 프로젝트팀이 편집한 <8.15의 기억> 19쪽, <매일신보> 

문화부장을 거쳤던 조용만의 <京城夜話> 284쪽, 서문당의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下>와 몇몇 신문 기사 등은 이 사진을 같은 설명을 달고 게재하고 있다.

 

사실 8월 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해 일본으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는 9월 9일 사이에 일본인이 보인 행동을 담은 공식 사진은 찾기 어렵다. 미군이 한국에 진주한 후 일본인들을 찍은 사진은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약 25일 동안 일본인들의 동향을 담은 사진을 대할 수 없다. 전쟁에서 승자만이 사진을 갖는다고 했다 (大島, 1975).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찍지는 않았겠지만 조선인들은 사진을 찍어 두었음직 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일본인을 담은 이 사진은 귀중한 사진이다. 해방 공간에서 보였던 일본인들의 당혹스러움이나 침통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라면 어떤 사진이든 크게 환영을 받을 것은 뻔하다. <사진 #3>은 누구라도 그 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픈 사진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래 이 사진은 1945년 8월 16일자 마이니찌신문(每日新聞) 도쿄 본사판 제 2면에 실려 있었다 (

佐藤, 2005, 54). 사진 설명에는 “불탄 흔적이 있는 곳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는 요쯔야 마을 사람들”이라고 붙어 있다. 언제 부턴지,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왔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일본에서 찍은 사진이 한국에서 찍은 것으로 바뀌어 대중 서적에 , 신문에 실리고 있었다. 8월 15일 정국을 묘사하는데 적절성이 있었을 거라는 믿음, 

욕망으로 이 사진은 여러 출판물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석 장의 사진은 그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그 지위만으로 8월 15일 해방공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해준다. 그 들의 신세 풀이를 통해 해방 공간 서사를 시간, 공간에 따라 변화시킬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전혀 새로운 구성도 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적절한 이야기가 된다면 사진 속 기표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도록 기의를 붙여버리기도 한다. 


시간을 공간으로 옮겨놓는 사진의 속성을 이용해 (주형일, 2003, 16쪽), 기억을 그 공간에 갖다 붙이게 만들고, 다시 시간을 불러일으켜 새롭게 기억을 구성하도록 하는 그런 작업들을 꾸준히 해낸 셈이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해방 공간이 수많은 놀라움, 수군댐, 전달, 소통, 황당함, 어리둥절 등이 한데 모자이크된 것임을 전해준다. 


역사책들은 이 사진들을 한 치도 오차 없이 배치해 마치 손꼽아 기다리며 항일했던 결과로 해방이 온 것처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민족은 기다리던 그 날을 마침내 맞게 되었고,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식의 내러티브에 사진들은 활용되어 왔다. 실제도 사진처럼 정말 그랬을까? 혹 그날을 새롭게 받아들일 만한 전혀 새로운 사진은 없는 것일까? 아직 8월 15일 그날을 찍은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사진을 만나지 못했다. 왜 만나지 못한 것일까, 있기는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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