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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용진 Jul 23. 2020

지움의 문화, 내림의 문화

'남'은 때로 좋은 스승입니다. 

이사가 잦은 나는 짐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자신을 살피는 기회를 얻게 된다. 짐을 풀어놓고 정리에 나서자마자 나는 곧바로 무력감에 빠져든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에어컨을 다는 일, 위성방송 접시 안테나를 다시 다는 일, 인터넷 설비를 하는 일, 도시가스를 재접속하는 일 등. 어느 것 하나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중년이 넘도록 전세를 전전해야 하는 무능함에 이 같은 무력감이 보태지면 곧잘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이사가 전해주는 또 하나의 기회는 우리 사회의 문화에 대한 성찰이다. 에어컨을 다시 달기 위해 출장 온 배관공은 입을 삐죽 내민 채 앞서 해둔 배관 작업에 불평을 퍼붓는다. 이 따위로 일을 해두면 어떻게 하느냐고 혼잣말로 구시렁거린다. 접시 안테나 다는 이들, 인터넷 설비를 하는 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앞선 일 처리에 대해 어김없이 불평을 쏟아낸다. 앞선 이의 일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이른바 ‘지움의 문화’에 익숙해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움의 문화’는 문화적 켜가 생기지 않게 하는 독소다. 기술이 축적되지 않게 하고, 전통이 쌓이지 않게 작동함은 당연지사다. 지움이 손쉽게 이뤄지는 만큼 불신도 속도를 붙이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주위엔 설익은 새로움 일색이고 타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범람하게 된다. 고색창연함은 낡음으로 치부되고, 남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위선적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매번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개혁을 외치며 구태를 벗겠다고 외치지만 대중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켜가 쌓이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가 이뤄진 예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움의 긍정적인 측면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뭉갠 채 이뤄지는 새로움은 학습보다는 낭비의 효과를 낼 공산이 크다. 지하철 사고의 흔적을 물로 지워버리는 일은 사고의 아픔을 지우기보다는 더 상처내는 일임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노벨 과학상이 학문 축적의 산물이지 지능의 산물이지 않음도 누누이 과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지움의 문화’를 거둘 때가 되었다. 더 이상 늦추어져선 안 되겠다. ‘지움의 문화’ 반대편엔 무엇이 있을까. 구태여 말하자면 ‘내림의 문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앞선 작업을 반면교사 혹은 전수의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철저한 분석과 평가를 내세우면서 앞선 문화를 대하자는 태도가 그에 해당하리라. 무턱 댄 삐죽임이나 청산이 아니라 모든 과거로부터는 배울 것이 있다는 태도가 될 터이다.


‘내림의 문화’가 충만한 이사 풍경은 좀 더 살갑지 않을까. “어이쿠, 앞의 분이 에어컨 관을 적당히 잘라 놓으셨네” “인터넷 선을 이렇게 이을 수도 있구나, 나하곤 방식이 다르네” 하고 말이다. 내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라면 작업한 언저리에 작업방식을 간단히 메모해두는 일도 해낼지 모를 일이다. 더 적극적이라면 전의 작업과 자신의 작업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포함된 집단에 전파하는 일까지 이어질 수도 있으리라. 한 번의 작업이 일회의 배설적인 일로 그치지 않고 이같이 이어진다면 우리 삶의 켜도 한층 더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덕분에 이사도, 삶도 한층 더 흥겨워질 것이고.

어김없이 2년 후엔 다시 이사를 해야 한다. 그땐 두 가지 기쁨을 다 맛보고 싶다. 내 집을 갖는 기쁨과 ‘내림의 문화’를 대하는 기쁨 모두를 얻고 싶다. 하지만 그때도 전세의 서러움 속에 사는 이들과 지움의 시대를 머릿속에서 지워내지는 않으리라. (이젠 집을 마련해 더 이상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전 일을 잊지 않으려 다시 포스팅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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