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수동에 대한 소개가 연일 이어진다. 공간의 변신을 통해 젊은 층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한국의 브루클린’, ‘핫플레이스’, ‘성리단길’의 별칭에서 보듯이 성공한 도시 재생의 실례로 칭송을 받고 있다. 머잖아 지방 도시가 성수동을 모델 삼는 시도를 꾀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대부분의 도시가 구도심 몰락을 경험 중인 터라 성수동 언급은 쉽게 수그러들진 않을 것 같다.
성수동의 성공을 언급할 땐 여러 공간 사건이 동원된다. 그중에서도 성수동은 특히 ‘팝업 스토어’라는 사건을 독점적으로 꿰차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정 상품이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한시적으로 문을 열어 운용하는 임시 매장을 말한다.
임시 가게, 쇼윈도 가게, 떴다 가게, 유동적 가게, 번개 장터라는 번역어가 뒤따른다. 가게 공간은 고정적일 것, 가게의 성공 여부는 지속성이라는 관습을 거스르는 획기적인 형태인 팝업스토어를 동반한 탓에 성수동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팝업스토어를 동반해 성공을 거둔 데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의 변화를 잘 포착한 결과다. 소비력이 왕성
한 젊은 층이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감각에 줄을 잘 댄 탓이다. 팝업스토어는 모든 고정된 것을 거부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을 넘어서려는 새로운 감각과 궁합을 제대로 맞춘 가게 형태다.
고정보다는 유동, 지속보다는 한시, 익숙 보다는 변화를 더 선호하는 감각에 맞춘 가게다. 그런 탓에 성수동의 바뀐 얼굴을 특정 개념으로 규정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바꿔, 바꿔, 시간도 공간도 모두 다 바꿔” 정도로 그 모습을 기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 많은 공간 담론들도 그에 주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탁월한 포착과 규정을 칭송하기도 한다.
팝업스토어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크 오제가 언급한 “비장소”에 가까운 공간이다. 오제는 사람은 북적대지만 인간성은 사라진 공간을 그렇게 불렀다. 머릿수는 많으나 인간적 유대는 사라진 공간을 그렇게 지칭했다. 분주히 오고 가는 군중의 잰 발걸음만 존재하는 공간, 어떤 소통도 없이 넓게 조경된 황량한 광장 등을 비장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공간의 특성을 개인, 소외, 외면으로 규정했다. 인간적 유대가 실종되면서 개인만 존재하고, 연결보다는 외면이 더 힘을 쓴다. 그럼으로써 북적대긴 하지만 외로워지는 소외가 자리 잡는 공간이 된다고 비장소를 설명했다.
오제가 ‘비장소’를 특정하고 그곳을 문제로 삼은 것은 ‘비장소’가 사회 불안의 원천이 될 잠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쳐가는 공간인 ‘비장소’에는 타자의 현존이 없다. 시간의 흔적이 없는 그곳에서 타자를 느낄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인간의 때를 묻힌 공간도 며칠 상간에 사라지고 마는 탓에 유대의 흔적이나 만남의 시도는 지워지고 만다. 그 안에선 화폐의 교환만이 모든 교환의 중심이 될 뿐이다. 시간과 공간은 화폐 교환을 위한 불쏘시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공간 담론은 그 같은 면에 주목하진 않았다.
팝업스토어가 즐비한 성수동이 비장소라는 개념에서 비켜가진 않는다. 오히려 오제의 우려 이상의 비장소성도 지니고 있다. 팝업스토어 건축을 위해 동원되는 모든 자원, 물질은 신박함을 쫓는 인간 욕망의 자원에 그치고 만다. 모든 자원은 기능성을 다하고 나면 부수고, 버리는 것일 뿐 그 어떤 존재의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소비의 대상이고, 소비 행동이 모든 사건의 최상층에 존재함을 경험하는 탓에 인간의 소비를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도구주의적 신념을 강화시킨다. 수없이 얼굴을 성형한 팝업 스토어의 잔해는 성수동 뒷골목에 방치되어 비정함을 상식화한다. 이 또한 공간 담론이 외면한 성수동의 장면이다.
성수동이 팝업스토어와 동반해 비장소성을 강화하고, 반생태성을 강화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공간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방향을 선회할 필요가 있다. 더 자주 비장소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비장소성이 자아낼 도구주의, 비인간주의를 성수성을 매개로 더 강하게 주장할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팝업스토어는 그동안 이뤄져 왔던 젠트리피케이션의 최정점에 서 있음을 설파해야 하며 그동안의 도시 공간 담론을 반성하는 시작점이 되어야 함을 선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