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는 수저 계급론이라는 지독한 현실적 알레고리를 요리라는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름 없는 '흑수저'가 이미 권위를 획득한 '백수저'를 꺾는 서사가 그 역할을 해낸다. 서사를 통해 구조적 불평등이 못마땅한 시민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특히 주목할 씬은 눈을 가린 심사(Blind Test)다.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이 씬은 프로그램의 썸네일 역할을 한다. 평등으로부터 소외되었다 느끼는 자들에게 그토록 갈구하던 공명이 발생하는 시뮬레이션이다.
현실의 정치는 계급과 인맥, 불투명한 절차로 오염되어 있음을 누구든 인식하며 살아간다. 적어도 <흑백요리사>의 가상 전장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이 싸움터에선 오직 '맛'이라는 절대적 가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환상을 전한다. 이는 사회적 가속화, 불평등으로 인해 불만을 품으며, 부서진 주체에게 미각의 즉각성에 매달려 실시간의 진리를 맛보게 권한다.
맛은 즉각적이지만 기만적이지 않다. 혀끝에 닿는 순간의 감각은 복잡한 담론이나 정치적 수사보다 훨씬 정직하게 다가온다. 젊은 세대가 그 같은 미식에 열광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와 부조리한 구조 탓이다. 그 구조 탓에 유일하게 자율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에 열광한다. 그리고 그나마 내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선택권이 있고, 나의 음식에 대한 취향이 있음에 안도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미각적 민주주의는 위험한 함정을 안고 있다. 경연이 보여주는 극도의 능력주의는 구조적 모순을 망각하게 한다. 흑수저가 백수저를 이기는 '기적'은 오직 개인의 천부적인 재능과 피나는 노력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이는 결국 구조가 고장 나더라도 네 실력이 있으면 그만이라는 그 뻔하디 뻔한 신자유주의적 도그마를 강화한다.
그래서 청년들이 요리 경연을 열심히 시청하는 일에 이어 맛집 줄 서기 실천에 바치는 인내와 열정으로만 그치지 말길 희망한다. 그렇게 마감되는 일은 우리가 함께 할 에너지의 파편화 같아 보인다. 구조를 향한 분노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것 같기도 하다. 에너지가 가라앉고 파편화 되어 각자의 식도로 침전될까 불편하면서도 두렵기도 하다. 식탁은 화려해지지만 고립되고 그래서 떠들고 함께 해야 할 정치는 쭈욱 배설되고 마는 것 같아 거북하다.
이 미식적 열망을 또다시 새로운 에너지로, 함께 하는 동력으로 이끌 수 있을까. 먹는 것에만 집착하지 말라고 흰소리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에너지를 펴며 함께 하라고 정치적 공세를 펴기엔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디민 식탁에서 느꼈던 그 정직한 공명과 공정한 평가에 대한 감각을 사회 전반의 요구로 확장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을 뿐이다.
미식의 경험을 사유의 경험으로 치환해 보자고 손을 끌고 싶다. 한 접시의 요리가 나오기까지의 노고와 생태의 헌신을 읽어내듯, 우리가 향유하는 서비스 이면의 구조적 배경을 한 번은 질문해 보자. 미각적 취향을 넘어선 사회적 미학의 순간을 맞는 기분도 가히 나쁠 것 같지 않다.
공정에 대한 갈구라는 무의식적 에너지를 제도적 투명성 강화로 분산시키면 어떨까. <흑백요리사>의 블라인드 테스트가 주었던 그 서늘한 정의로움을 잘 기억해 두자. 행정과 정치의 영역에서도 체감할 수 있도록 말이다. 권위의 해체와 기회의 평등을 요구하는 구체적 움직임으로 연결하자면 너무 욕심 많은 제안이 될까.
같이 먹자(Commensality)의 본래적 의미를 모두가 같이 먹어보자. 혼자 맛집을 찾아 사진을 찍고 소비하는 파편화된 행위는 너무 고독해 보인다. 그를 넘어 식탁을 공유하고 서사를 나누는 공동체적 경험을 복원하는 데까지 이르는 일은 너무 버거운 일일까.
미식의 즐거움이 개인의 감각적 만족에 머물지 않길 희망한다. 타자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는 사회적 식탁으로 확장되게 애써보자. 그때 접시 위에 고였던 에너지는 비로소 세상을 바꾸는 온기가 되지 않을까.
허기진 영혼들이 식탁 위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존엄이다. 인간이기에 함께 먹고 먹음을 통해 함께 할 존재임을 느끼고 경험한다. 존엄에 대한 느낌과 경험이 단지 혀끝의 쾌락으로 휘발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이 거대한 미식의 유행을 사회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정치적 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