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시대의 철학을 번역하는 물리적 텍스트였다. 근대 건축은 한때 데카르트적 이분법에 기반했고 인간 이성을 뽐내는 기계 역할을 했다. 현대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파편화된 기호로 재현하며 후기 산업 자본주의 논리를 공간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는 인간과 그 이성을 중심에 두는 화려한 철학 유희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기후 위기와 생태적 절멸의 위협 앞에 선 우리는 인간 중심의 오만에서 비켜서야 할 운명에 놓인다. 건축에도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인간 중심적이었던 건축 패러다임은 새로운 철학 사조를 마주하며 오히려 인간 바깥에 더 주목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그 진로를 구부리고 있다.
새 철학 사조와 건축
전통적 건축에서 사물(재료)은 인간의 의지를 담은 수동적 대상일 뿐이었다. 시멘트와 철강은 설계자의 도면대로 형상화되는 질료에 지나지 않았다. 신유물론 철학이 등장하면서 그런 인식은 급격히 변한다. 건축의 재료. 질료는 고유한 생기를 지닌 행위자가 된다. 그래서 건축물은 더 이상 고정된 사물이 아닌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난다. 미생물, 습도, 부식, 그리고 탄소 분자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공간이 된다. 온갖 사물이 더불어 사는 사물의 의회가 되기에 이른다.
그뿐이 아니다. 새로운 철학 사유에 기대면 건축은 인간 명령에 복종하는 형태를 만드는 작업 이상이 된다. 사물과 자연의 행위능력을 인정하며 그들과 협상하는 작업이 된다. 인간의 두뇌에서, 손으로 그리고 건축물로 이어지는 선형적 프로젝트를 넘어선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얽혀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행위자 그물망을 짜는 일로 바뀐다.
건축은 그간 시각적 미학이나 기능적 편의성에 주안점을 두어 왔다. 새로운 철학 사조들은 그 주안점을 넘어서는 입장을 펴고 있다. 신(新) 현상학은 공간을 힘이 느껴지는 장으로 파악한다. 공간을 무덤덤한 허공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신체를 자극하고 주무르는 움직임의 현전으로 공간을 파악하려 한다.
그로써 우리는 특정 공간에 들어섰을 때 압도적인 공기를 느끼고, 빛의 산란이 피부를 찌르고, 재료의 질감이 미세한 떨림을 제공하는 경험을 한다. 건축이야말로 바로 그 같이 생기가 흐르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처럼 새로운 철학 사조는 건축 공간이 인간과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전혀 새로운 기운을 전달할 가능성을 지님을 알려주고 있다. 당연히 그 같은 공간 창조야말로 건축의 목표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새로운 철학이 건축에 건네는 의제
이래저래 건축가에 던져진 임무는 더 복잡해졌다. 더 이상 형상을 설계하고 만드는 자에 그치지 않는다. 공기, 산란, 떨림을 자아내는 수행을 부여받는다. 인간 중심의 사명을 지워가며, 공간이 뿜어내는 비인간적 에너지가 인간의 신체와 공명하게 만들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새로운 철학 사조에 따르자면 건축가는 고립된 오브제를 만들지 않는다. 주변 환경 및 거주자의 신체와 에너지를 주고받는 흐름의 결절점을 만드는 유력한 창조자가 된다. 새로운 철학 사조는 자연과 문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그 사조를 앞지르거나 혹은 동행하는 현대 건축은 각종 센서와 스마트 시스템, 지속 가능한 에너지 순환망과 결합한 거대한 생체-기계 시스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건축이 그 시스템을 자인하고 온갖 테크놀로지를 성찰적으로 대하기를 새로운 철학은 권하고 있다.
새로운 사유는 건축을 확장된 신체이자 외부화된 장기로 파악하고 있다. 건축물의 외피도 인간의 피부처럼 호흡한다. 태양광을 흡수하고 빗물을 정화하며 도심의 열섬 현상을 스스로 조절한다. 그래서 인간은 더 이상 건축의 유일한 주인공이 아니다. 기술적 네트워크와 생태적 순환 고리의 일부로서 존재하며 기능한다.
새로운 철학 사조는 이제 건축이 그 육중한 인간 중심주의의 외피를 벗어던져야 함을 강조한다. 지금까지의 건축이 자연을 배경으로 삼아 인간의 위대함을 상징했던 시절을 반성한다. 미래의 건축은 자연과 사물, 그리고 인간이 대등한 지위에서 얽히는 공존의 생태학을 구현하길 권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친환경 자재를 쓰자는 일차원의 사유를 넘어선다. 존재에 대한 사유를 혁명적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이다. 건축물을 완결된 존재가 아닌 지속적 생성 과정으로 파악한다. 인간을 위해 짓되 인간만을 위하지 않는 건축, 사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술과 생명을 유연하게 통합하는 건축. 새해를 맞으며 새로운 사유와 철학을 떠올리며 그런 실천이 어떻게 가능할지 가늠해 보면 어떨까. (2026년 1월 5일 자. <전문건설신문>의 일부를 수정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