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처음으로 끝난다. 한 번뿐인 처음, 처음을 즐겨라.
모든 것이 처음인 여행이다. 이 정도의 장거리, 장시간 여행도, 교통수단으로 이용할 버스, 기차도 처음이다. 역시나 숙소도 처음 경험해 보는 방법을 이용하게 되었다. 호스텔. 한국에서 고등학교 단체 수학여행 갈 때나 특별하게 이용하던지, 유럽에나 가야 흔하게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숙박시설이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미국에도 호스텔이 많다는 사실에 그리고 저렴하다는 사실에 놀랐고, 한국에도 요즘에는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같은 시설들이 엄청나게 생겨났다는 사실에 새삼 한국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구나 싶어 먹먹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불안요소는 숙소였다. 대부분의 호스텔들에는 호텔이나 모텔과는 다른 까다로운 조항들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숙소를 예약할 때는 위치나 가격 등을 확인하고 바로 인터넷으로 결제해 버리면 끝이었지만, 호스텔에는 추가되는 것들이 많았다. 사진 등으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청결이나 안전성 등, 게다가 몇 인실인지, 남녀 혼숙인지 등 여러모로 복잡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엄청난 사실, 나이 제한, 거주지 제한 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로컬에 거주하는 사람은 안된다는 조항, 심지어 미국 시민은 안된다는 곳도 있다. 나야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휘드르면 되니 문제는 안 되겠지만 동시에 여권까지 챙겨가야 하니 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나이 제한. 호스텔은 역시나 유스호스텔의 줄임말인가? 30 혹은 35세 이하 등으로 제한되는 곳들이 있었다. 그것도 남자만 제한되는 곳들도 있었고. 규정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고, 없는 곳은 없어서 안 써놓은 것인지 인터넷 예약사이트가 단순 대행업체이기에 정확한 기술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인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처음 가보는 곳에서 차도 없는데 잘 곳도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처음이기에 아무것도 몰랐고, 모든 것이 불안했다. 결론적으로 나중에는 이러한 것마저 까맣게 잊은 채, 그냥 신분증은 미국 운전면허증 내보이고 예약할 때 깨알같이 쓰인 조항들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어졌다. 혹시나 예약한 숙소에서 못 머물르게 되는 불 쌍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다른 데 가서 자면 되는데 뭐가 그리 불안했을까 싶다.
그렇게 걱정이던 샌프란시스코 첫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면서도 계속 긴장. 결제를 하고, 여러 주의 사항을 듣고 방 카드키와 내가 쓸 침대보까지 받고 나니 긴장이 다소 풀린다. 보통의 숙박시설들에서는 이미 셋업이 되어있는 침대보를 따로 받아 드니 새삼 호스텔에 왔다는 실감이 나고 일단 한 단계를 넘어섰다는 뿌듯함마저 든다. 하지만 진짜 처음이라 당황할 문제가 바로 방문 넘머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방문을 여는 순간 보이는 3개의 2층 침대와 그 위에 올려져 있는 옷가지들. 당연히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방을 쓰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비어있는 한 곳에 짐을 내려놓고 앉아 한숨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흠짓 놀라고 말았다. 침대 위에 흐트러져 있는 여자 옷가지들. 물론 호스텔에 따라 남자방, 여자 방 따로 있기도 하고 혼성 룸이 있기도 하다. 예약을 하며 최대한 남자방으로 했고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그냥 혼성 룸으로 예약을 했다. 아마도 이곳 호스텔이 그 불가피한 상황이었나? 사실 예약하면서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었는데 막상 여자 옷가지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짐을 다시 들고선 프런트로 나와 물었다. 내가 혼성 룸으로 예약했느냐고.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숙소에 무사히 들어와 편안했던 마음이 썰물같이 물러가고 괜스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자세와 옷차림을 계속 정돈하게 된다.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방에서 혼자 뻘쭘의 깊은 나락에 빠져버렸다.
한참 후 들어오는 동유럽 쪽에서 온듯한 4명의 여성과 1명의 남성 룸메이트들. 낯선 이 가 방에 있는 것을 보고선 흠칫 놀란 듯 하지만 반사적으로 '하이' 하며 인사를 건넨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4명을 봐서일까? 나의 화들짝 놀라기는 4인분이다. 나 또한 반사적으로 '하이' 하며 인사를 건넨다. 조용히 씻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어가 잠이 든 후 다음 날 조용히 나왔다. 이 또한 결국 첫날만이었다. 호스텔 예약이나 체크인이 익숙해진 것처럼, 남자든 여자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같은 방에서 어울려 숙박을 해결하는 것 또한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한 달 남짓 집 밖을 나와 돌아다니며 많은 숙소들을 이용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여러 일들을 겪어볼 수 있었다. 좋기도 했지만 어렵고 힘든 기억들도 있다. 좋든 나쁘든 유독 특별한 추억은 바로 이 샌프란시스코 호스텔에서였다.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에 그래서 경험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경험들과 느낄 수 있었던 감정들. 다시는 처음 일 수 없기에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그 순간들.
지난 여행의 여러 날들 중 하루를 골라 다시 경험하라 하면 바로 이날이다. 당시에는 당황했지만 왠지 풋풋한 나를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날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앞으로 또 다른 처음의 상황을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좀 더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근 40년을 살아오면서 내 삶 속에서 만났을 수많은 처음이 있었을 텐데 이제와 이런 여유가 생기는 것을 보면 내 삶 또한 처음은 아닌, 삶 자체에 익숙해져 버린 나이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또 다른 처음이 기다려진다. 그 처음을 만나러 나는 또 여행을 꿈꾸고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