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그래도 또 혹시나
항상 혹시나 하는 생각을 달고 사는 편이다. 뭔가 뜻밖의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남들보다는 조금 더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성격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내 삶을 귀찮게 한다. 이 성격이 대표적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 어딘가를 가기 위해 짐을 쌀 때이다. 항상 필요 이상의 짐을 챙기곤 한다. 혹시나, 어떨지 모르니까 하는 생각에서 바지, 티셔츠, 그리고 잠옷까지 긴 옷, 짧은 옷, 두꺼운 옷 그리고 얇은 옷으로 두루 챙기고 여분으로 더 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도 별일이 없으면 집에서 입던 운동복을 그대로 입고 나가 돌아다니고 다시 들어와서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다. 결국 챙겨간 옷들 중 태반은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돌아오곤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었다. 작은 짐으로 편히 돌아다니겠다는 다짐이었다. 게다가 나의 본능은 자연 스래 작은 가방 사이즈에 막혀 버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방이 내 본능을 채워줄 만큼 넉넉했다면 10월 한 달간으로 계획되어 있는 이 여행의 막바지에는 춥지 않을까 하며 겨울용 두꺼운 외투까지 챙겨갔을 나였기 때문이다. 아직 캘리포니아는 화씨 90도, 섭씨로는 30도를 연일 웃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고 마침 밤에 출발이었기에 긴팔 하나는 입은 채로 가기로 했다. 그래도 가을 문턱인데, 그리고 동부 쪽까지 가는데 하나쯤은 있어야지 싶었다.
출발하려 집안을 한번 둘러보고 문을 나섰다. 가져가려다가 결국 넣을 곳이 없어 소파에 던져놓은 두꺼운 후드티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역시나 제 버릇 개 주냐는 옛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가방은 이미 얇은 티셔츠 한 장도 들어갈 자리가 없고 긴팔이라면 하나 입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나 자신을 타박하며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지우려 애써봤다. 하지만 내 고질병은 결국 잠갔던 문을 다시 열게 하였다. 그냥 손에 라도 들고 다니자 하며 거추장스러운 불편함으로 불안감을 잠 재우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여행 중 그 후드티를 가장 많이 입고 다녔다. 혹시나 하는, 그래서 항상 여분의 짐을 지게 하는 그 불안감이 여행을 살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언제나 불편함이었던 그 습관이 나를 살렸다. 여행 첫날부터 그랬다. 버스를 타고 새벽에 도착한 첫 여정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난 14년여 동안 엘에이에서 살며 느끼지 못했던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몰랐다 샌프란시스코가 이렇게 추운 곳인지. 그래서 용감했었나 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덜덜 떨며 손에 들고 있던 후드티를 껴입었다. 그리고 남은 한 달 여의 여정 속에서 후드티는 없어서는 안됐을, 아마도 없었다면 하나라도 구입해서 입었을 소중한 품목이 되었다.
혹시나 하면 거의가 역시나 하며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비한 뜻밖의 일은, 혹시 나하는 생각지 못했던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걱정도 팔자라며 자신을 타박한다. 하지만 나는 하지 않아도 되었을 지난 수고들 덕분에 오늘 난처한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도 알지 못하게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었던 것은 내가 귀찮아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에서는 짐이 작은 것이 좋다. 가벼운 것이 편하다.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떠나야만 한다. 하지만 필요한 것들은 반드시 챙겨야만 한다. 문제는 우리가 떠나 보기 전까지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기사 그렇기에 여행이 더 재미있는 것이지 싶기도 하다. 우리 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