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보니 없으면 안 될, 없어도 될
나에게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태블릿이 있다. 태블릿이라고 어디에 꺼내 놓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웬만한 랩탑 무게에 그만큼의 두께를 자랑하는, 그렇게 자신의 나이를 드러내는 태블릿이다. 그래도 나에게 한참 동안 컴퓨터가 없던 시절 그 공백을 메꿔주었고, 랩탑을 구입한 이후에도 랩탑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들을 만족스럽게 감당해 주었다. 이제 여러 기능들이 너무 느려져 동영상이나 책 읽기 용으로만 사용하지만 그 용도 이외에는 필요도 없기에 아쉬움도 없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도 함께 하게 되었다. 당연히 랩탑을 챙겨가지만 말 그대로 랩탑이 채워주질 못 할 부분들, 장시간 이동 중에 동영상이나 책을 보기에는 태블릿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역시나 가방 사이즈 문제에 부딪쳤다. 근래의 태블릿들에 비하면 무게나 두께가 터무니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래 봤자 얇은 태블릿인데 이것 하나 가방에 더 들어간다고 어쩔까 싶었다. 하지만 충분히 어떡하지 싶게 가방 지퍼가 잠기지 않았다. 이리저리 물품들을 재정비 후에 간신히 지퍼를 잠글 수 있었다. 무게 차이도 만만치 않았지만 옷 한두 벌 가져가는 것 보다 나에게는 이 태블릿이 더 중요하긴 했다.
그리고 여행 첫날. 오랜 친구였던 태블릿은 애물단지로 돌변해 버렸다. 충전기를 챙기지 않은 탓이었다. 안타깝게도 내 태블릿은 보통의 스마트폰 충전 케이블이 호환되지 않는, 주먹만 한 충전기를 따로 가진 모델이었다. 생각해보니 충전기를 잊지 않았던들 가방에 넣을 공간이 없어 못 가져왔겠다 싶었다. 그랬으면 태블릿도 놓고 왔을 텐데. 아니다, 아마도 옷 한 벌을 더 뺏을 지도 모르겠다. 이 생각 저 생각이 교차하며 머릿속을 오갔다. 첫날 충전기가 없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더 당황한 것은 가방의 무게가 생각 이상으로 무거웠다는 점이었다. 군 제대 이후 최고의 무게를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싸며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내 체력은 군대 군장을 지던 수치에 멈춰있었으니 큰 착각이었다. 그 후 십 수년간 다운그레이드를 거듭해 왔을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하긴 그간 이런 것을 지고 장시간 다닐 일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쓸모가 없어진, 아니 쓸 수가 없어진 태블릿을 한 달을 지고 다녀야 한다 생각하니 더욱 막막해졌다. 어차피 고물이라고 열심히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아 그냥 버릴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버리지는 못했지만 한 달여의 여행 동안 말 그대로 여행을 함께 하기만 했다. 우습게도 충전기를 챙겼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태블릿을 놓고 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만 들었다. 단순 짐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막상 사용을 못하게 되고 보니 딱히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화기로 충분히 대체되었다. 아니 오히려 전화기가 편했다. 태블릿이었으면 가방에 넣고 빼기도 힘들었을 테고 주된 사용처였을 좁은 버스 간에서는 더 더 번거로웠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치로 따지자면 태블릿에 비해 많이 별 것 아닌 충전기인데, 결국 태블릿을 못쓰게 되자 충전기가 사소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참 당연한 사실인데. 태블릿이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여행에서도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막상 사용하지 못해보고서야 얼마든지 대체가 되는 물품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정말 흔하게 있을 때는 몰랐다. 그게 그렇게 나에게 중요한 것인지 혹은 그게 없어도 별 문제없는 것인지. 없으니까 알겠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혹은 내가 얼마나 쓸데없이 매달렸는지.
여러모러 매달렸던 것들이 참 많았다. 그것들이 내 삶을 지탱해 준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지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매달리느라 오히려 나를 붙잡아주는,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겨왔던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잊어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지금, 결국 그토록 매달렸던 것들 중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를 붙잡아 주는 소중한 모든 것들은 더욱 나를 강하게 지탱하게 해주고 있다.
무엇에든 전심을 다하는 것 나쁘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마음을 다한다한들 시선마저도 모두 빼앗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마음을 빼앗긴 마당에 그게 쉽겠냐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