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혹은 두려움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이 어림잡아도 3000장은 훌쩍 넘지 싶다. 하루에 100장 이상은 족히 찍어댔으니 그렇게 한 달, 30일이면 3000장은 충분히 넘는다. 수많은 사진들에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고,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의 감정, 추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중에서도 이 사진만큼 가장 뚜렷하게 당시의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은 없다. 재미난 것은 여행 사진들 중에 가장 오래된 사진인데도 그렇다. 다시 말하자면 여행의 첫 번째 사진이다.
여행이야 많이 다녀봤고 그것도 혼자 떠나는 것도 처음은 아니었지만 평소 타 볼 일이 없던 버스를 주로 이용하고 게다가 한 달이라는 긴 여정의 여행은 처음이었기에 출발 전부터 온몸은 긴장으로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그 긴장감은 바로 시작 점인 LA에서 버스를 타며 최고조로 올라왔다. 그 날 선 긴장감에 더해 초짜 여행자 티 내듯 짐을 품에 고이 안고 탄 덕에 꼼짝하기도 힘든 사이즈의 버스 좌석에서 무릎에 올려진 가방의 무게가 보통이 아님을 밤새 실감하며 곤욕을 치렀다. 온 밤을 뜬 눈으로 보내며 그저 빨리 도착해서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속에 새벽 5시쯤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군대가 그렇다. 처음 훈련소에 들어가서 모든 것이 통제되기 시작하면 정말 힘들다. 일단 훈련소 6주간이라도 빨리 끝나고 자대 배치받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훈련소만 벗어나면 숨통이 트이겠지 기대하지만 자대 배치를 받아 내무반에 첫 발을 딛이는 순간 들이마시는 공기가 가르쳐준다.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어? 이게 아닌데!" 라며 더블백을 매고 이제 막 군 생활을 시작하는 어리바리한 이등병의 그것이 나에게 드러났다.
내가 상상해 왔던 장면이 있었다. 바로 첫 여행지 도착 시점에서 기대했던 장면이 있었다. 여행의 첫 시작점이었기에 계획을 짜며 그 어떤 장면보다 많이 상상해 왔던 장면이었으리라 싶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도심 한 가운데 빌딩 숲, 새벽 출근길에 오가는 바쁜 직장인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특유의 멋진 옷차림들. 사실 재작년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아침 절에 차를 타고 스쳐 지나며 본 일이 있었기에 그 길에 사람들과 섞여 걷는다는 기대감이 더 했다. LA라는 대도시에 살지만 실상 그 옆 Orange County라는 시골에 살기에 괜한 도시에 대한 동경이 이를 더하게 했다. 하지만 내 상상과는 많이, 아주 많이 달랐다.
새벽 5시는 아직 사람들이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높은 빌딩 숲은 이루고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한밤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어두운 새벽의 높은 빌딩들은 오히려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현실을 파악하고선 상상과는 다른 환경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황은 순간이었다. 곧이어 이는 두려움으로 돌변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샌프란시스코의 추운 날씨 때문이었다.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해도 될까?라는 두려움으로 당장 어찌해야 할 바도 알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모른 채 그대로 얼어버렸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추위가 독이면서도 약이었다 싶다. 그냥 서있을만했으면 생각과는 다른 풍경과 어둠 속에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위가 좀 밝아질 때까지, 누군가가 보일 때까지, 그렇게 내가 상상했던 장면과 조금이라도 비슷해지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하지만 온몸에 엄습해 오는 추위는 일단 살려면 피해야 한다는 본능으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다행히도 눈 앞에 보이는 스타벅스. 일단 그곳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고 커피 한잔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출발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억지로 손에 들려준 두꺼운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구글 지도로 주변을 확인한 후 회복되는 기대감과 슬그머니 떠오르는 자신감과 함께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여름에도 긴팔이 필요한 곳이 샌프란시스코라는 사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처음과 동반하는 긴장, 설렘, 두려움 등, 처음이기에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들이 있다. 좋은 감정만 느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만은 없는 것이 결국 처음이라는 이유에서 온다. 지나고 나면 그 피하고 싶었던 기억들 마저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웃음 짓게 하니 그게 여행의 묘미인가 싶다. 그리고 그 처음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닌가 싶고. 그렇게 하나씩 배우고, 알게 되고.
떠나기 전에 모르는 곳을 상상하는 즐거움과 설렘, 가서는 상상과는 다른 상황에서의 당황, 그리고 돌아와서는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경험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음 도전을 찾기. 돌아온지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내 여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