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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이(Maui) 동생

by 최용주

나는 8남매 중 다섯째로서 계속 아들만 낳았던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때 “어휴, 또 아들이야!” 하시면서 실망을 하셨단다.

2년 후 낳은 자식이 또 아들이었으니 부모님은 그만 자식을 보기로 하셨다 한다.

그러나 아쉬워 6년 후 자식을 낳으니 딸이었고 너무 기뻐 연년생으로 딸을 하나 더 보아 6남 2녀의 대가족이 되었다.

같은 동네의 옆집 강 아저씨네는 10남매의 대가족을 자랑하였으며, 큰이모도 우리보다 1~2명 더 많은 자식을 가졌으니 그 당시의 많은 자식을 가진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많은 형 밑에서 나와 남동생은 이래저래 같이 부대끼고 자라왔다.

형들에게서 받았던 핍박을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에게 풀어야 하는데, 동생은 나에게 핍박을 받을 놈이 아니었다.

나보다 터프하고 운동신경이 뛰어나 나에게 죽어지내기는커녕, 나를 제 동생처럼 대하는 동생 같지 않은 동생이었다.

동네에서도 자기보다 2~3년 나이 많은 아이들과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는 골목대장이었다.

따라서 나를 알기를 우습게 알고, 형이라 부르지도 않고 제 친구 부르듯이 “용주야!” 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내가 입대 전날 술에 취해온 동생은 울면서 “용주 형, 그동안 미안했어. 담부터는 꼭 형이라 부를게” 한 후 지금까지 깍듯하게 형 대접을 하고 있다.

나는 동생을 사랑하였으며, 동생은 형들과 다툼이 일어나면 항상 나의 편이 되어주는 우군이었다.

동생은 운동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하여 이름을 날리던 고등학교에서 유망한 축구선수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진학하는 과정에서 고등학교 코치와 동생의 의견 차이로 인해서 대학진학 및 실업팀으로 진출하는 것이 실패한 후 동생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당시 코치는 여러 선수를 묶어서 특정 팀으로 보내려 하였고, 동생은 별도로 자기가 원하는 팀으로 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코치가 동생의 진로를 방해함으로써 발생한 체육계의 고질적인 비리였다)

당시 운동선수들은 대부분이 학교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오직 운동만 하였던 운동기계이었기에 동생은 운동을 그만두니 사회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없었다.

일단은 머리로 할 일은 없는 상황에서 몸으로 때우는 일을 찾다 보니. 너무 험한 일들만 있었다. 가스통 배달, 각 상점에 물건 배달하는 일, 월부 책장사, 비디오 촬영 기사 보조, 등등.

동생은 한 가지 제대로 끈기 있게 하는 일이 없었다.

하는 일마다 1~2달, 길어야 3~4달 하다가 그만두기가 일쑤였다.


동생은 몇 년 동안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부모님의 눈치를 보면서 집에서 빈둥거리던 때였다.

신문을 보던 동생이 갑자기, “어, 나 이것 배워야겠다.” 한다.

부모님은 또 엉뚱한 일 저지를까 염려스러워 모른 척하셨다.

독일에서 온 둘째 형이 TV를 보고 있다가, “뭔데?” 하니, “나 요리를 배워야겠어. 여기 학원에서 6개월 코스 요리 강습이 있는데 나 요리 배워서 요리사로 취직해야겠어.” 동생이 말한다.

둘째 형은 “아, 요리사, 그것 선진국에서는 좋은 직업이야. 그것 좋은 생각이다. 한 번 배워봐.”한다.

부모님은 ‘또 돈만 들이는 헛짓거리할 거’라면서 애써 반대하시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속는 셈 치고 6개월분 수강비를 대 줄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 등록한 동생은 자기의 취향에 맞았는지 열심히 다녔다.

당시 요리사는 전문직으로 우대받지 못하는 직업이었으며,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요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시절이었기에, 요리사라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요리를 가르치는 학교도 거의 없었으며, 요리사들은 음식점 주방에서 일하면서 요리를 배우다가 요리사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하여 요리학원으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동생은 요리학원에서 실무경험이 풍부한 동료 수강생에게서 요리의 실무를 배울 수가 있었다.

동생은 운동선수로서 멋을 낼 줄 아는 멋쟁이였다.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학원의 경리를 보던 아가씨에게 가끔은 껌이나 만난 과자를 선물로 주면서 아가씨의 호감을 얻었다.

당시 큰 음식점이나 호텔의 주방에서 요리사를 구할 때 요리학원에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동생에게 호감을 느꼈던 경리 아가씨는 국내 최고의 호텔인 H****호텔의 주방에 동생을 소개해 주었다.

이리하여 동생은 첫 요리사의 경력을 일류 호텔 주방에서 시작하는 행운을 잡았다. (하지만 당시 동생은 운동으로 성공한 친구들을 만나면 요리사 한다는 것이 부끄러워 호텔의 영업사원으로 일한다고 하였다)


일류요리사로 입지를 굳힌 동생은 해외관광공사에서 모집하는 미국의 휴양도시인 마이애미(Miami)의 유람선에서 일하는 요리사로 취직하여 30여 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동생은 유람선 주방의 요리사로 일한 지 3~4년이 지나서 근무지를 이탈하여 불법 이민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국의 LA, Seattle, San Francisco 등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보낸 20여 년 이상의 불법 이민 세월이 너무 힘들었다 한다.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법 이민자가 겪었던 고생을 다 적으면 책으로 2~3권은 쓸 분량이므로 갖은 고생이라 하겠다)


10여 년 전에 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형, 나 베드로인데, 여기 미국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는데 나 한국에 가면 일 해서 먹고살 수 있을까?”

동생이 힘들어 귀국하겠다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야, 그렇게 힘들면 들어와라. 형들하고 돈 조금씩 모아서 식당이라도 차리면 되지 않겠니?”

이 말을 옆에서 들은 아내는, “당신 책임질 말을 하세요.”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타국생활 힘들다는 동생에게 매정한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동생이 귀국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5년 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나 베드로야. 나 하와이에 와 있어. 여기서 일식점 운영하고 있어. 식당이 잘 되고, 곧 있으면 나 결혼할 거야.”

‘참 도깨비 같은 놈이네’ 생각하며, 잘 지내고 결혼한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 전화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휴양을 하려 하와이의 호놀룰루(Honolulu)에 들렀다가, 일식 식당에 걸린 ‘요리사 구함(Cook Wanted)’이란 푯말을 보고 며칠만 일하러 갔는데, 일하는 중 주인이 너무 일을 잘 한다하여 오랫동안 있어 달라 사정하기에 그 식당에서 일하다가 그 식당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하였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고객으로 다니던 한국인 디자이너와 만나 결혼한 동생은 우리들을 하와이에 초대하여 형들과 여동생들은 하와이에 가서 동생과 즐겁게 지내고 왔지만, 나는 동생에게 폐를 끼칠까 봐 가지 않았다.

동생이 여러 번 초대하였지만, 아내는 폐를 끼치기 싫고, 현재는 자기가 직장 다니느라 시간이 나지 않으니, 직장을 그만두면 그때 가자 하여 아직껏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제수씨와 엄청난 싸움을 하여 서로 이혼 소송을 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은 이혼소송 비용으로 운영하던 식당마저 다 날려버린 동생은 몇 년 동안 연락을 주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고 마음이 아팠으나, 워낙 잡초처럼 질긴 생을 보낸 동생이 재기할 거라 믿고 있었다.


한 3년 지난 후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는 현재 마우이에서 식당을 경영한다고 하였다.

하와이 제도는 8개의 주요 섬과 124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되었는데 8개의 주요 섬 중의 하나가 ‘마우이’이다.

거기에서 한국 여인을 만나 재혼하여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하니 또다시 변신한 동생에게 경이감을 느꼈다.

동생은 실의에 차서 하와이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마우이’로 가, 그곳의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을 하던 중 사업에 성공한 한국 여인과 만나서 결혼 후 부인의 도움을 받아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좋은 음식 솜씨 덕에 식당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차례 나에게 마우이로 놀러 오라고 하였지만, 아내의 시간이 안 되어 못 가니, 나중에 일을 그만두면 가겠다고 미루어놓고 있다.

작년 동생이 한국에 와서 잠시 강남에서 보았다. 그 자리에서 동생은, “형수님 언제 일 그만둬? 일 그만두면 내가 비행기 티켓(ticket) 사서 보낼 테니 그때는 꼭 와서 나랑 같이 시간 보내. 마우이에 오면 우리 집에서 지내고, 내가 이제 식당 그만두었으니 남는 것은 시간이니까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형 골프채는 사 놓았고, 형수 골프채는 내 집사람 골프채 몇 개 있으니 그것 쓰면 되니까 꼭 와.”한다. “알았다. 집사람은 1~2년 이내에 일 그만두니까 그때 가서 같이 지내자.” 대답하였다.


세계적인 여행 잡지에서 ‘최고의 섬’으로 칭송받으며, 호리병 모양으로 신비하게 생긴 섬의 모양만큼이나 무한 감동을 선사한다는 마우이를 방문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렌다.

‘그림처럼 이어지는 하얀 모래사장과 눈부신 바다, 세계 최대의 휴화산 할레아칼라 등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아기자기한 거리, 그리고 소박한 미소가 가득하다’라는 마우이에 가서 동생 부부와 함께 지낼 시간이 기다려진다.

설레는 맘을 안고서 인터넷을 통하여 마우이에 대하여 알아보니 아래와 같다.

「마우이섬(Māui)은 면적 1883.5 ㎢(제주도보다 살짝 큼)로 하와이 제도에서 하와이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으로 화산의 용암으로 형성된 두 개의 섬이 하나로 연결된 화산섬이다. 오아후섬에서 약 120k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우이섬은, 인구 117,644명(2000년)에 연간 3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곳이다. 마우이섬에는 행정적으로 몰로카이섬과 라나이섬, 카호올라웨섬을 관할하는 마우이 군 자치 정부가 있다.

관광, 파인애플, 목축업이 주요 산업이고 최근까지 기간산업이었던 사탕수수 재배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특히 백인들이 선호하는 관광 휴양지로 알려진 마우이에는 백인이 36%, 일본인 23%, 이어 필리핀인과 하와이 원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주요 행정구역으로는 카홀루이 공항 인근에 개발된 상업지역 카훌루이와 카운티 행정부가 몰려 있는 와일루쿠, 그리고 관광과 항구도시로 유명한 라하이나(예전의 하와이제도 주도, 현재의 주도는 호놀룰루)를 들 수 있다. 또 마우이에는 할레아칼라 국립공원과 10개의 주립공원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16개의 골프 코스, 그리고 해수욕장이 81군데나 산재해 있다. 일명 계곡의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섬은 매년 미국 10대 아름다운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신혼여행지로 부상하고 있다.」


동생 부부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마우이’에서 보낼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지만, 아내는 자기 은퇴 후 코로나 19 의 위기가 사라지면 그때 가자한다.

“하느님, 이 지구상에서 코로나 19를 추방하셔서 지구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해방해 주시고 그들이 자유롭게 서로를 방문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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