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한 라짜로>
이따금 영화를 볼 때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우리에게서 127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잠시 빌린다. 그 시간 동안 라짜로는 일하고, 일하고, 가끔 웃고 단 한번 눈물을 흘린다. 돌려받은 시간은 현재를 향해 다시 흐른다. 간극에 텅 비어버린 내 시간을 채운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렇게 습습한 마음일까.
인비올라타는 여느 과거 시골마을인 듯하다.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다 못해 마을 구성원이 모두 함께 거주하고 노동한다. 인비올라타에는 어떤 소리가 끝없이 들린다. “라짜로!”
마을 청년인 라짜로는 모두의 라짜로이다. 어디에 있든 부르면 나타나는. 어느 것이든 부탁할 수 있는. 영화 초반은 계속해서 인비올라타 사람들의 노동과 전통적인 농촌생활을 보여준다. 마냥 아름다운 풍경에 왠지 이질감이 드는 것은 라짜로의 존재때문이다. 마을 누구보다 일을 열심히 하고 도와주는 라짜로 임에도 그의 존재는 어디엔가 있을 법한 인비올라타를 대단히 이질적인 판타지로 만든다. 그가 너무 순수한 탓일까.
갸우뚱해질 때 나타나는 후작 부인과 그의 아들 탄크레디. 탄크레디가 쥐고 있는 휴대폰을 보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소작농과 후작과 담배농사. 금발의 소년과 락스피릿 해골 티셔츠와 휴대폰. 인비올라타에 이질적인 두 세계가 공존한다. 소작농과 후작부인이 절대 직접 접촉하지 않듯이 접촉하지 않는 두 세계가 공유하는 존재는 오로지 탄크레디와 라짜로 둘 뿐이다. 지배계층에 있으면서도 순응하지 않고 엄마인 후작부인에게 의심을 품으며 스스로를 납치한 탄크레디. 탄크레디는 라짜로를 형제로 칭한다. 탄크레디의 납치극이 전개될수록 라짜로는 두 세계를 횡단하고 열병을 앓게 된다. 그렇게 아픈 몸을 이끌고 탄크레디를 찾는 라짜로는 절벽으로 떨어진다.
초반의 나레이션을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지만 <행복한 라짜로>는 대단히 종교적인 영화이다. 라짜로라는 이름은 라자로에서 따왔다. 라자로.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시켰다는 성인. 그렇기에 이질적이고도 순수한 청년의 낙하는 두 세계의 구원을 향한다.
탄크레디는 결과적으론 후작부인의 대사기극을 외부에 폭로하는 계기가 된다. 허무맹랑하면서도 엄청난 대 사기극. 후작부인은 홍수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인비올라타를 발견했고 마을 사람들을 담배농사의 소작농으로, 무려 십몇년이라는 세월을 무급으로 착취하고 있었던 사실을 말이다. 그리하여 탄크레디는 그토록 바라던 후작부인의 착취를 막았고 착취 당하던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구출된다.
늑대는 낙하한 소년을 배회화고 소년은 다시 눈을 뜬다. 후작부인의 집을 털러 온 도둑들을 도와주다 도시로 가게 된다. 알게 되는 사실은 모두의 시간이 흘렀을 때 라짜로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는 것. 또한 대 사기극의 결말은 분명 ‘구출’이지만 구출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라짜로는 다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지만 순수한 눈에 들이밀어지는 건 그만큼이나 순수한 발길질. 늑대는 그를 떠나 도시를 달려나간다.
착취의 연쇄작용은 공간과 계급, 이데올로기를 막론한다.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피지배 계급은 더 아래의 피지배 계급을 착취한다. 착취의 이름은 공간이기도, 계급이기도,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어떤 착취의 피라미드 가장 아래를 라짜로는 바치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착취는 계속해서 작용할 것이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모순의 비극은 ‘행복한’과 ‘라짜로’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크다. 라짜로에게 잠시 빌려준 시간을 돌려받은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살아가기 위해 피라미드를 밟고 서있는 우리는 밟혀지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을 어떤 방식으로 호명할 수 있을까. 죽음으로 구원해줄 선인조차 존재할 틈이 없는 이 빽빽하고 견고한 피라미드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