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
그런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 시절 일기를 숙제로 내줬었고 날마다 꼼지락 쓰던 기억들. 사실 매일 열심히 쓰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나는 좀 더 멋진 어린이였을 텐데 말이다. 그때의 나를 변론하자면 일기 쓰기가 너무 어려웠던 이유는 어떤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일기를 쓸 때 “오늘은~/날씨가 어땠고/무엇을 했다”에서 끝나면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그러니까 일기에는 그런 기록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느낀 감상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 저는 하루를 살았을 뿐이지 아무것도 느낀 게 없는데요. 그렇게 따질만한 깜냥은 없어서 그냥 일기 쓰기를 포기했다. (절대 내가 게을러서 안 쓴 것이 아니다.)
행동의 기록과 주관적 감상을 구분하려 했기 때문에 일기 쓰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패터슨>을 보는 내내 ‘일기’ 욕구가 차오르며 생각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행동의 기록이 감상으로, 감상이 또 다른 행동으로 이어져 맞물린다. 기록하는 연필이 억지로 감상을 짜내지 않아도 연필을 쥐고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의미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패터슨>은 일기를 쓰는, 더 자세히는 일기라는 행위를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다.
영화는 시이기도 하지만 일기 같기도 하다. 2시간 동안 훔쳐보는 남의 일기. 패터슨 씨의 일기를 엿보는 틈틈이 마련된 시, 음악, 미술 등의 예술들은 반복되는 일상의 기록과 감상이 풍부하게 얽히게 한다.
<패터슨>에 나오는 패터슨 씨의 비밀 노트를 보다 보면 이내 각자의 일기를 뒤적이고 싶을 것이다. 그 찰나의 욕구를 건져보는 건 어떨까. 쪼개고 쪼개며 쓰는 시간은 잠시 무시하고 손에 집히는 아무 노트나 들어보자. 노트를 아무렇게나 만지작거리자. 텅 빈 노트와 당신 사이의 틈이 가져다주는 무엇에 귀 기울인다면 어떠한지. 행여 그것이 천국보다 낯설지라도.
씌여진 시, 혹은 틈. 일상, 혹은 아름다움
영화, <패터슨>
패터슨시에 사는 패터슨씨가 있다. 직업은 버스 운전사이며 아내 로라와 반려견 마빈과 함께 산다. 6시 조금 넘어 일어나 미리 준비해둔 옷을 입고 출근한다. 버스에 앉아 동료의 푸념을 들어주며 일을 시작한다. 저녁에 돌아와 사랑하는 로라와 식사를 하고 마빈과 밤 산책을 하고 바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돌아오면 하루가 마무리된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은 패터슨의 손에서 다시 씌여진다.
패터슨은 틈틈이 시를 쓴다. 모든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말이다.
<패터슨>은 ‘시’를 담은 영화 중에서도 시 그 자체가 된다. 영화의 형식으로도 우리는 [월-화-수-목-금-토-일-그리고 다시 월요일]이라는 8연 구성의 시를 느낀다. 화면에 새겨지는 시(자막)는, 패터슨 씨와 패터슨 시와 결합하여 또 하나의 이미지로써 시를 만들어낸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아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관계는 숨을 쉬며 살아 움직이는 관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에서도 자아는 환경을 반영하고 환경은 자아를 반영한다. 로라가 이야기해주는 쌍둥이 꿈을 들은 패터슨의 하루는 ‘쌍둥이’를 좀 더 예리하게 인식한다. 마빈과 패터슨은 편지함을 사이에 두고 긴장감을 주고받는다. 이 긴장감을 두 자아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패터슨 시에도 ‘불금’은 찾아온다. 약간의 변화들이 [월요일~목요일]에 있었다면 [금요일~일요일]엔 작고 큰 사건들이 일어난다. 영화는 반복 속의 변주를 주목한다. 우리가 완벽히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애정 어린 응시는 의외 것들, 비일상의 끝없는 침투를 발견한다. 우연히 놓인 성냥갑이라던가, 새로 산 기타라던가, 누군가의 실수라던가, 피로한 하루, 그 하루 끝에 스치는 다람쥐라던가.
도쿄가 아닌 오사카에서 온 시인과의 짧은 대화는 완벽히 시적인 비일상이다. 또한 묘하게 삐거덕거리던 패터슨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순간이다. 침투한 비일상은 틈을 만든다. 패터슨은 그 틈으로부터 다시 산책을 시작하며 시를 떠올린다. 반복과 변주가 채우는 노트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패터슨의 삶이 다시 월요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예술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모든 근거는 영화는 스펙터클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탈 일상의 안전한 간접 체험, 그로 비롯된 스펙터클을 보장한다. 모험이나 여행 등이 짜릿한 것은 일상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일상은 돌아갈 수 있는 안정감이다. 안정이 확보된 상태에서 맛보는 불안정성은 매혹적인 짭짤함이다. 그에 매료되면 일상은 지루하고 탈출해야 할 장소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일상의 틀이 존재하지 않는 탈 일상은 불안함이며 위협이다. 그렇기에 지루한 일상이 필요하면서도 짭짤한 스펙터클을 찾는 우리는 극장을 방문한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스펙터클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정보는 넘치고 도시의 스펙터클은 보이지 않는 곳곳에 퍼졌다. 중독된 스펙터클로부터 달아난 우리가 찾아낸/도망친 곳은 다시 일상이다. ‘소확행’의 가치와 <리틀 포레스트>, <응팔>등의 ‘백투더~’ 열풍은 현상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은 영화인 <패터슨>이 오랫동안 받는 사랑은 단지 짐자무쉬의 네임 벨류 때문만은 아니리라 짐작한다. 짐 자무쉬는 스펙터클에 가려진 일상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벗어나고 싶은 상태로 묘사될 법한 일상의 단편에서 예술을 찾아내고 그 자체로 나풀거리는 영화를 만든다. 그러면서도 일상을 판타지로 미화하지 않는다.
그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 <패터슨>은 언제고 꺼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혀가 아릴 듯 짭짤하기보단 틈이 필요할 땐 23번 버스에 탄다. 정처 없이 바깥을 구경하다 패터슨이 내려주는 곳은 어디든 마음에 든다. 당신의 패터슨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