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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麗水) ; 여행자(traveler)의 우수(憂愁)

칼럼

by 바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평론을 쓸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한적이 있다.

“작가가 소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강을 하게 만든다.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에도 한강의 문장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있었다고 믿게 된다.”

이번 4일간의 여수 여행도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비슷한 결의 의미로 다가온 것이 사실이다. 나에게 ‘여수’란 어떤 곳일까? 10대 때 즐겨듣던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의 배경이 된 낭만적인 곳. 한국지리 이기상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면 그 경이로운 자연 경관을 직접 보고 싶었던 동경의 장소. 2012년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The Living Ocean and Coast)”라는 주제로 세계박람회(Expo)가 개최되었던 곳. 항상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꿈과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여수에 대한 내 생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0살 새내기 때 읽었던 신경숙 작가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라는 작품을 읽을 때가 시발점이었다. 고등학교 현대사 시간에 단순히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과정에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애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의 이야기 내러티브 안에서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독자인 필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아 교수님의 추천 도서로 전쟁과 사회(김동춘 저)를 읽으면서 여순 사건을 시발점으로 제주 4.3, 해방직후 한국전쟁 ,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우발적이며,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실은 개인의 사적 감정 보복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할 말을 잃게 되었다.

여수는 이후 나에게 한 측면에서는 화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보물인 동시에, 다른 한 측면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비극의 시발점이자 아픈 손가락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작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로 광주 5.18과 제주 4.3을 세계적으로 각인시키며 공론화하는 공을 세웠지만, 아직도 한국 근현대사에서 재조명 받아야 할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들은 너무 많다. 작가 황석영의 ‘손님’의 배경이 된 황해도 신천,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여수와 순천 일대로 최소 1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여순 사건, 이외에도 대구와 거창까지. 작가 황석영이 모든 근대는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라고 했던 것처럼, 2025년 한국에서 이 비극적 사실에 대한 담론은 망각의 길을 걷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옛날부터 강원도 평창 토박이인 할아버지나, 할머니, 작은할아버지들, 큰아버지들이 항상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전라도 사람들은 당최 속을 알 수 없다. 뒤에서는 다른 말 하는 사람들 많이 본단다.”

왜 그런것일까? 여수와 순천, 광주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집단적 광기의 학살이 진행되었지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동안 이에 대한 사실을 입밖에 꺼내는 순간 극도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고문 당하거나 희생 당했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강압적 침묵의 DNA가 지역 사회 문화 뿌리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번 여행에서 만나 여수에 대한 감상과 생각들을 적어본다. 여수는 2026년에도 세계 섬 박람회가 열린다고 한다. 주변에는 엑스포의 흔적이 남아 화려한 자본주의의 상징적 빌딩들과 테마파크, 아쿠아리움, 하룻밤 상대를 찾는 젊은이들의 낭만포차가 가득하였다. 이 부분에선 지극히 ‘미래’적이며 ‘현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임명되어 본영으로 활용하였던 진남관을 비롯한 국가 문화유산들이 여수 시내 곳곳에 있었고, 여순사건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동백꽃이 가득 찬 오동도와 새벽같이 하루를 시작하는 어부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선 지극히 ‘과거’적이었다. 쉽게 말해 내가 3박 4일동안 지켜본 ‘여수’의 모습은 화려한 현재와 미래, 그리고 우수(憂愁)에 가득찬 과거가 같이 공존하는 모순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 공간에 있으면서 ‘여수(麗水)’라는 장(場)이 미시적으로는 나 개인, 더 거시적으로는 한국사회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5년 광복 후 아직 100년이 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존재하였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물질적 성장은 하였지만, 정신적 성장이 그 속도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표면적으로는 SNS에서의 행복한 가면을 쓰지만, 이면적으로는 익명 커뮤니티에서 본질을 드러내는 암울하고 모순된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이전에 작가 최인훈의 분단문학 ‘광장’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다. 주인공 명준은 남한 사회에서는 ‘밀실’만을 느끼고, 북한 사회에서는 집단의 ‘광장’만 있다는 것에 염증을 느끼다가 배 위에서 부채꼴의 끝으로 좁혀오는 듯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부분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가 해방 직후 좌우 이념 대립이라는 모습으로 감추어졌지만 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양민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기독교가 무엇이며, 마르크스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착취당한 소작농들 중 일부는 좌익 세력에 편에 섰었고, 지주들은 우익 세력의 편에 섰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을 아주 압축적인 시간에 달성해야 했으며, 미군정의 지지를 확고히 하고 일본의 입김을 하루라도 빨리 차단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렸다. 결국, 그 과정에서 반대 좌익 세력 토벌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해서는 안될 짓을 해버렸고, 이승만의 행위를 초월하여 주체자들끼리의 사적 감정 보복으로까지 증폭되어 세계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반인륜적이며, 천하가 공노할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작가 황석영이 한국 근대의 마마 ; 천연두(손님)으로 지적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굉장히 통찰력 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남한과 북한은 현재 분단된 상황이고,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법치주의를 선택한 남한은 북한보다 월등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주 먼 훗날 흡수통일이 가능할지라도 우리는 여수와 순천, 제주, 한국전쟁 시기 한반도, 신천, 그리고 광주에서의 아픔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극도의 반공주의 아래에서 또다른 희생자들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글을 쓰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수의 사랑’ (한강 저)에서 나온 주인공들은 저마다 폭력과 학대의 대상으로 죽음만이 그들의 구원의 길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운 삶의 궤적을 그려왔다면 그건 거짓이다. 누구나 삶에서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 정도가 깊으면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상흔(傷痕)이 남아버린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틈이 있고, 빛은 그 틈 사이로 들어온다는 레너드 코헨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흔을 직시하며 나는 이 실존적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2025년전 골고다 언덕에서 완벽한 인간이자 완벽한 신으로 오셨지만, 십자가에 못이 박혀 손이 뚫려버린 그분께서 대신 나의 상흔을 가져가셨기에 나의 틈들이 사랑과 빛으로 채워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한과 북한의 문제도 같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우경화를 비롯한 극도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북한 김씨 일가의 독재 정권 문제의 괴리 사이에서 우리는 그 틈이 너무 커서 이제는 메울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지거나 현재 세대는 무의식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망각을 선택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갈라진 흉터라도 모든 것을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눈동자를 생각할수록 나는 이 갈등의 문제조차 빛과 사랑, 희망과 환희로 탈바꿈할 날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여행자(traveler)의 우수(憂愁)를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p.s. 칼럼의 첫 번째 이미지는 나무 사이에 유일하게 핀 이름모를 붉은 꽃이다. 무언가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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