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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by 바람

가끔 아주 하염없이 걸을 때가 있다. 그곳이 어딘지도 잘 알지 못한채로, 계속 걷는다. 연초에 인턴 근무 퇴근 후에 지인인 H와의 저녁 식사 약속이 있었다. H랑 여러 이야기를 나눈 뒤에, 안국역 근처에서 헤어졌다. 집에 가려면 지하철을 탄 뒤에 종각역으로 간 뒤에 금정역으로 가야했다.

숨을 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내 네이비 목도리를 뚫고 폐부에 가득찬다. 담배를 피면 이런 느낌일까. 차가운데 싫진 않은 기분. 에어팟이나 버즈를 너무 자주 잃어 버려서 보급형 무선 이어폰을 올리브영에서 3만원 주고 산 뒤에 자주 쓴다. 그 이어폰을 끼고 안국역과 광화문, 종로 3가 일대를 계속 걸었다. 깊은 사색에 빠지고, 음악이 배경이 되니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

'아, 집에 가기 싫다. 내일 또 출근하는 것도 너무 지겹다.'

중학교 때도 평촌 학원가에서 보습 학원 수업이 끝나면 럭키 아파트까지 30분 가량을 항상 걸어갔다. 여름 밤과 노을녁을 배경으로 이어폰을 끼고 지나가는 차들과 행인들의 표정을 구경하곤 했다. 다들 무표정이다. 우린 왜 사는걸까? 저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가끔 보습 학원 수업을 들을 때 친누나인 예빈이 누나에게 연락이 온다.

<발신>
용규야, 오늘 아빠 술 먹고 옴.

이 메세지를 보면 갈 곳이 없어진다. 학원이 끝난 뒤에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나도 집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집이 없다. 이어폰을 끼고 사색에 잠겨 집까지 걷다보면 어느새 집 정문 앞에 도착한다. 문을 열었을 때의 광경이 상상된다. 보기 싫어서 다시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는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슬프다.

다시, 연초 안국역을 걸을 때를 생각해본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침대에서 아파하며 보내다가, 12월 26일에 첫 출근을 했다. 복잡한 생각없이 일에 몰두하니 잡념이 많이 사라졌다. 연초의 안국역과 종로 3가의 저녁은 뭔가 몽환적이다. 거리를 휘다니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아이와 두 손을 잡고 가는 젊은 부부, 찻집에서 안온하게 대화를 나누는 노부부. 다들 행복해 보여서 나도 행복했다.

지도도 켜지 않고 계속 걸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난 내가 집이 아닌 공간에 있을 수 있어서 감사했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마시며 검정치마의 노래를 듣는게 좋을 뿐이었다. 계속 걷다보니 3호선 지하철 역에 도착했고, 평소보다 2시간 정도 늦게 집에 들어갔다.

20살 때 제일 많이 느낀 감정은 공허함이다. 그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느낌. 불행하진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때 그 감정이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닌 것에 자그만한 위안을 얻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미도리가 전화로 와타나베에게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답하지 못한다. 공간적 위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실존적 위치를 모르는 것이다.

오늘도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호원초등학교까지 걸어왔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전학 올 학교를 탐방하기 위해서 왔을 때 맡았던 아카시아 꽃들의 향기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지나온 25년을 걸어왔고, 오늘도 걸었으며, 앞으로도 걸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이며, 그 길이 고독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자 인간학적 질병이다.

다만, 그 길을 같이 걸어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접한 뒤로는 어디로 가든 두렵지 않고, 자유롭게 되었다.

만약에 방황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같은 걸음걸이, 같은 템포로 항상 걸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고독하지 않게 바라보는 노을은 경이로울 뿐이다. 외롭지 않길 바랄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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