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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glasses)

칼럼

by 바람

나는 고등학교 때 공부할 때는 안경을 썼었다. 매일 캄캄한 독서실에서 오후 11:45분까지 3년동안 공부를 하니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결국, 20살 새내기 때 스마일 라식을 하였고, 안경을 벗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종종 안경을 썼던 때를 회상하고는 하는데, 콧등에 안경 자국이 눌려서 아토피 기운의 나의 피부에 염증을 일으켰던 적이 생각나 별로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성인이 되고 적지 않은 사람들과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교류하면서 다른 종류와 의미의 안경을 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거기에도 적지 않은 염증을 느끼고 있다. 다음은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안경을 쓴 사람들이다.

1. 이데올로기 (ideology)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자신의 가치 체계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어떤 이는 그 가치 체계에 사랑이나 희망, 혹은 돈이나 성공을 두곤 하는데, 내가 제일 염증을 느끼는 안경을 쓴 부류는 이데올로기 ; 이념을 가치체계의 꼭대기에 둔 사람들이다. 자신과의 정치적 성향이 조금만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면 얼굴 표정부터 달라지는 부류. 자신은 진보주의자인데, 조금만 보수적인 내용의 이야기를 꺼내면 흑백논리에 빠져서 아무런 대화나 타협은 거부하는 부류들. 인간은 굉장히 다층적 구조의 존재이다. 어느 측면에서는 보수적일 수 있고, 다른 측면에서는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진보적인 성향이 강세하면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세하면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멸공 이데올로기에 갇혀 진보를 아예 극좌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주사파 이데올로기에 갇혀 보수를 극우나 태극기 부대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면 페미 꼴통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남성 군복무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대남 프레임에 씌우는 사람들. 자신의 가치체계 안에 인정(人情)이 아닌, 이념이 자리한 사람들은 대화할 때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곤 한다.

2. 신앙과 과학
신앙과 과학을 이분법적으로 대하는 안경을 쓴 사람들도 대화할 때마다 숨이 많이 막힌다. 보통 완벽한 유물론자들이나 성서 근본주의자들을 마주할 때면 그런 경험을 하곤 한다.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같은 이들이 유물론 신봉론자의 선두주자이다. 정말 정직한 어느 철학자의 이야기를 설교에서 들은 적이 있다. 유물론이 정말 진리라면, 그러니까 우리가 물질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면 당장 자살을 하지 않아도 될 이유는 없다는 말이었다. 유물론이 정말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까? 최재천 교수가 언론에서 “우리는 아직도 구석기 시대의 윤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이미 핵무기라는 최첨단의 기술을 손에 쥐고 있다.”라는 말은 유물론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았을 때, 인간 윤리의 진보가 정말 유물론(혹은 환원주의)라는 전제 아래에서 가능한지 되묻게 만든다.

반면, 성서 근본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성경 글자 그대로를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 ;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성서에 대한 은유적 및 비유적 해석 자체를 차단해버린다. 이전에 강산 목사님이 성서(bible)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성경은 우리를 위해(for us) 쓰여진 것은 맞지만, 우리에게(to us) 쓰여진 것은 아니다.”

굉장히 통찰력 있는 말이다. 성서에 대한 해석은 그 세대의 문화와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에서도 “오늘날의 교회는 초대교회를 전제하고 신경을 쓰지만, 초대교회는 미래 교회를 상정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다. (p.185)”라는 말이 있듯이 성서에 대한 근본주의적 해석은 굉장히 위험하다. 기독교 신학의 양극단에서 어떤 이들은 이성만을 신봉했고, 어떤 이들은 계시나 신비 체험만을 신봉하는 영지주의자들도 보았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이제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부분적으로 취하면서 발전해 가고 있는데, 특정 신학이 마치 모든 진리인 것 마냥 추종하며 어떤 이들은 ‘장로교’라는 안경, ‘감리교’라는 안경, ‘개혁주의’라는 안경, ‘방언과 신유’라는 안경, ‘순복음’이라는 안경으로 진리를 폄훼하고 훼손해 버리는 것을 너무 많이 본다. 우린 정말 무언가를 순수하게 볼 수는 있는 것일까?

작년 여름에 동기 U형과 일본 소도시인 다카마쓰를 여행할 때였다. 나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에 팔려서, U형이 나의 카메라로 내 뒷모습을 찍은 것을 칼럼의 메인 이미지로 첨부했다. 내가 이 사진을 보면서 든 생각은 같은 카메라지만 찍는 주체에 따라서 사진의 색감이나 느낌이 완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물며 이런 사진도 보는 주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데, 우리는 우리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타인을 ‘안경’을 끼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Julian barnes의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그 해답에 대해서 조금은 해갈(解渴)을 경험했다. 책을 읽으며 타인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저 사랑하고 서로의 흠과 결핍을 인내와 보살핌으로 채워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조금은 깨달은 것이다. 또한, ‘나’라는 개인의 실존적 존재는 오직 주체자인 ‘나’를 피조하신 분과의 관계에서만 해석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죽을 때까지 찾아 나서며, 끝없는 모순과 갈등 속에서 성장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린 죽을 때까지 안경을 온전하게 벗을 수 없다. 다만, 안경을 벗을 수 없더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사랑만 하기에도 삶은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너무 피곤하고 지친 삶이지만 나 자신부터 나 스스로, 그리고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본다. Big Happy Me!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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