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인도, 네팔, 그 후
수능을 목표로 10대를 보냈다. '문제와 정답'으로 이루어진 내가 알던 세계와 다른 뭔가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20대 초반에 알게 되었다. (내 발로 직접 떠난) 첫 여행인 내일로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이후, 대륙 찾아 떠난 대항해시대 유럽인들처럼 무조건 멀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교환학생은 내가 처음으로 이룬 첫 꿈이다. 꿈은 무조건 해외로 나가서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냥 '부딪치'는 게 꿈이라니 무모해 보일 수 있지만, 겁 많고 소심했던 나로선 크은 도전이었다. 당시엔 꿈이라 거창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항상 머릿속에 두고 1년간 틈틈이 학교를 찾아봤을 정도로 나름 진지했다. 건축 전공으로 가능한 학교가 거의 없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아일랜드, 덴마크 학교의 시각디자인까지 메일을 보내봤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터키에 있는 학교 중 건축 전공으로 가능한 곳을 찾아 지원했고 졸업까지 3학기를 남겨놓고 떠날 수 있었다.
터키 앙카라에 위치한 학교였는데 직항이 더 비싸다는 이유로 굳이 이스탄불을 거쳐서 야간 버스를 타고 앙카라로 이동했다. 20킬로가 넘는 이민가방, 7킬로 캐리어, 백팩을 메고 이스탄불에 내려서 버스 티켓을 샀다. (겪어봐야 깨닫는 스타일) 내가 왜 직항을 놔두고 이러고 있지? 후회막심할 때쯤 티켓을 사놓고 기다리면서 먹은 케밥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발로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는 게.. 뭔가..... 멋있었다. 이후로 모든 순간이 신기하고 가슴이 뛰었다.
단순 여행에 비해 교환학생의 큰 장점은 '살아보는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 호주, 영국 등 많은 한국인들이 살아보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닌, 여행으로 많이 찾는 나라에서 살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이 될지 그 순간에도 느껴졌다. 살아본다는 건 여행의 설렘, 낭만이 살짝 빠지고 일상적 경험이 남는다. 그래서 여행에 비해 더욱 현지스러운 생활이 가능하다. 현지인이 일상적으로 가는 식당, 집에서 해 먹는 음식, 듣는 음악, 보는 방송, 가족 풍경, 일상 대화, 종교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본 경험이 없어서 모든 게 충격인 동시에 그런 세계를 보는 게 좋았다. 매 순간 내가 아는 세계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학기가 끝나고, 6개월 전 끙끙대며 가져왔던 것 중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만 한국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다 버렸다. 짐을 최소화하고 떠났다.
개인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가장 멋진 도시는 암스테르담이었다.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나라였다. 바다보다 낮은 땅을 가졌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운하 도시를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 의견을 절충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배타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는 문화가 거리 곳곳에서 느껴졌다. 지나가다 구교회 바로 맞은편에 있는 Sex shop을 봤을 땐 한동안 얼음이 되어 서 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마약, 매춘, 동성애 결혼이 합법인 나라라 특이할 것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아니었다. 타고난 자연환경,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의사 결정 방식, 정치, 제도와 문화가 어우러져 도시, 건축이 되고, 또 이런 공간에서 영향을 받는 사람의 사고방식. 나에겐 이 모든 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Land becomes water, water becomes land."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에서 본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듯한 문장이 떠올랐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Monjuiic 쪽으로 가는 길에 만난 한 서점이었다. 전 세계 가이드북이 대륙 별로 정리되어 있길래 가이드북 전문 서점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해당하는 나라의 소설, 잡지부터 지구본, 지형 맵 등 세계 지도 덕후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지도, 그 나라에서 온 천으로 만든 가방까지 있었다.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가이드북을 들춰보다가 잡지를 통해 그 나라 문화를 엿본다든지 하는 새로운 책 읽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츠타야 서점처럼 단순 책을 팔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여기서 둘러보다가 Steve McCurry의 사진집 속 강렬한 인물 사진에 또 충격을 받았다. 배경은 전부 인도의 바라나시라는 곳이었다. 이 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과 색깔,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자연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어떤 나라일지 궁금했다.
1년 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인도를 갔다. 현실은 전혀 낭만적이거나 아름답지 않고 상상 초월이었다. 물론 혼자 무모하게 돌아다니거나 준비성 없이 가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준비를 철저히 하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 1번씩 들었다. 하지만 인도를 직접 보고 싶었던 이유를 떠올리니 금방 괜찮아졌다. (..?) 사진 한 장만으로 인도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풍경, 이런 신비한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건지, 어떻게 지구 상에 아직도 신분 제도가 있는 나라가 있는 건지,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다.
Chandigarh에서는 계획도시의 허무함, Taj Mahal에서 아름다운 건축을 만드는 힘, Jodpur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이면에 대해 생각했다. Varanasi에서는 무교인 내겐 관심 없던 종교와 그런 종교가 만드는 풍경을 보며, 무시무시하고 막연하게 느껴졌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놀라고 흥분하고 감탄하고 감동했다. 한국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게 당연하지 않은 곳이었다.
예전엔 여행이 끝나면 사람들이 하는 '현실 복귀'란 말에 동감했다. 복귀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려면 여행 작가나 디지털 노마드가 되는 방법도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더 나다운 방법을 고민했다. 왜 나가고 싶어 했고, 다니면서 언제 행복을 느꼈는지 생각해보니, '내 세계의 범위가 넓어지는 기분이 들 때'였다. 현실에서도 똑같이 느끼는 시점이 있다. 인사이트가 있는 책, 영상, 사람 등 형태가 무엇이든 새로운 발견을 했을 때.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비슷하지 않을까?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경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에 있다."라는 Marcel Proust의 말에 동감할 거다. 여행 따로 일상 따로가 아니라 여행은 여행대로, 일상도 여행처럼 살 수 있다고, 어느 순간부터 이런 믿음이 강하게 아주 강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