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9월의 분황사 황룡사지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어서어서

by Mia Kim

힐링할 여행지를 찾아 서점에서 뒤적뒤적 도시를 둘러본다. 평소 마음속에 두고 있던 교토랑 치앙마이 사이에서 고민한다. 치앙마이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카페들과 한 때의 유행인 것만 같은 분위기에 괜히 거부감이 들어 교토로 결정했다. 하지만 오사카 항공권을 사자마자 다음 날 태풍이 오사카를 뚫고 지나간다는 뉴스를 봤다. 어쩔 수 없이 항공권, 유심, 하루카, 숙소를 동시에 번갈아가며 빛의 속도로 취소했다. 이렇게 내 힐링의 기회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느껴지는 억울함과 함께 경주가 떠올랐다. 경주는 언제든 꼭 다시 가볼 것이라고 다짐했던 곳. 교토 대신 가는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막상 경주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고즈넉한 기와지붕, 그 지붕 위로 서울보다 더 커 보이는 하늘, 그래서 노을 질 쯤이면 모든 게 붉게 변하는 넓으면서 아늑한 곳이었다.







첫날 이동 경로: 팔우정 해장국 점심 - 분황사 - 황룡사지 - 교촌마을 - 계림 - 첨성대 - 또바기 저녁



분황사, 황룡사지는 원래 형태에서 파괴되거나 기단만 남고 사라진 곳이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봐야 하는 곳이었다. 특히 황룡사지의 목탑지에 있던 목탑은 몽골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80m 높이의 9층이었다고 한다. 축소된 목탑 형태는 근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데, 텅 빈 목탑지에 위치했을 실제 모습을 더 쉽게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록 파괴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보다 더 거대한 탑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상상해보니 마치 서울 한복판의 20층짜리 건물과 같은 거대한 모습이었다. 역사 유적지라 하면 한눈에 들어오는 낮은 1층짜리 사찰이나 3층, 5층 석탑이 떠오른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터에 자리 잡은 80m의 탑을 상상해보니 그 웅장함이 느껴졌다.



텅 빈 황룡사지는 초록 풀로 빈틈없이 꽉 메워져 있었다. 그 위엔 바람만 불며 풀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아무리 단단하고 화려하고 강해도 영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무너지고 사라지는 게 자연의 이치지만, 황룡사라는 옛날 사람들에게 큰 의미가 있던 장소가 있던 터에 와보니 새삼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쥴리아 로버츠가 로마 시대 건물이 파괴된 터에 가서 하는 말도 비슷했던 것 같다. 영원한 건 없다, 변화를 위해 파괴는 필수적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죽음, 사라짐은 생명, 탄생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하나의 사이클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더 집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된다.







둘째 날 이동 경로: 불국사 - 석굴암 - 시즈닝 점심 - 대릉원 - 어서어서 책방 - 동경 - 펍 플랫



불국사는 가기 전부터 항상 궁금했던 곳이다. 균형과 비례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석가탑과 다보탑 중심을 연결한 절반의 길이가 단위 길이. 그 단위 길이를 기준으로 대웅전 전체 회랑이 설계되었다. 석가탑, 다보탑 기단의 너비는 대웅전 너비의 3분의 1이기도 하다. "일 즉일체, 일체 즉일.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화엄 오교장” 의 말처럼 단위 길이가 하나의 기준이 되어 전체를 이루고 있다. 자하문을 통한 출입은 안되기 때문에 옆 관광객 문으로 들어가서 자하문의 중심에 서봤다. 왼쪽 석가탑, 오른쪽 다보탑이 양쪽에서 균형을 잡아주고 가운데 대웅전이 묵직하게 중심에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균형이라는 단어가 눈 앞의 공간으로 와 닿았다. 항상 균형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했지만 막상 그게 어떤 건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앞으로는 이 공간이 떠오를 것 같다.



석굴암은 셔틀을 놓쳐 어쩔 수 없이 1시간 동안 등산을 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올라가면서 계속 궁금했다. "왜 이런 높은 곳에, 어려운 길을 지나야 다다를 수 있는 위치에 석굴암을 만든 걸까" 세계 유일의 인공 석굴이라는 석굴암은 다른 불상과 다르게 더 조용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석굴암 속 불상을 본 후 나오면 산 아래에 경주가 펼쳐진다. 일상이 있는 공간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한번 다르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장소였다. 왜 이런 높은 곳에 있는 건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기도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큰 풍경을 마음에 담아 내려갈 수 있게 도와주는 위치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봤다.



석굴암의 불상은 완벽한 대칭이 아니라고 한다. 왼쪽 오른쪽 눈썹의 형태가 다르고 어깨, 무릎의 형태도 다르다고 한다. 심지어 불상 뒤에 있는 연꽃으로 된 광배도 원이 아닌 타원형이고 연꽃의 형태도 모두 같지 않다. 이건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서 봤을 때 불상이 완벽한 대칭, 그리고 광배가 원으로 보이도록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불상 자체에 더 의미를 두고 대칭의 형태로 만들 수 있었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시야를 먼저 고려한 공간이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종교 예술 과학의 작품답게 아름답지만 다른 사람, 보는 사람을 생각해 설계했다는 사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런 아름다움이 적용된 생각, 사람, 가구, 기술, 공간이 많이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셔틀을 타고 내려왔다.







어서어서 책방을 간 이유는 딱 하나였다. 책을 선물하는 경험. 서울의 땡스북스밖에 안 가봤지만 독립서점과 같은 분위기가 익숙했다. 대부분의 책이 대형서점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책들이었고, 그래서 더 훑어보고 싶게 만드는 장소다. 책을 사면 종이봉투에 담아준다. 읽는 약이라고 쓰인 밑에 선물 받을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직접 써준다. 1일 0회 0일분 취침 전후 0시간마다 읽기와 같이 약봉지를 따라한 위트 있는 봉투에 책을 넣어주는데, 이 종이봉투 하나만으로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게 한다. 책은 그 내용에 따라 단순한 물건보다 더 의미 있는 선물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읽는 약'이라는 선물 봉투를 통해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을 더 튼튼하게 해 줄 거야'라는 메시지도 함께 전해진다. 의도했을지는 몰라도 이 책방에서 주는 차별적인 경험은 1- 들어온 후 선물할 사람을 상상하며 책을 고르는 순간, 2- 책을 구매하는 순간, 3- 마지막으로 책을 선물하며 상대의 반응을 보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단순히 책을 사고 나오는 시점에서 끝나지 않고 사람 간 관계까지 고려했다.







경주의 매력이 버스 창문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왕릉의 능선에서 느껴졌다. 역사가 박물관 안에서 조용히 과거를 이야기하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과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황리단길 따라 기와지붕 아래 힙플도 분명 경주의 매력이지만 황룡사지, 불국사, 석굴암에 또 다른 웅장한 아름다움이 있다. 빠르게 변하는 황리단길과 같은 경주의 이면에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결항으로 못 가게 된 교토에 대한 아쉬움과 그 대안으로 온 경주에서 느낀 감동이 대비됐다. 단순히 힐링하러 온 데 비해 큰 감흥에서 오는 부끄러움이었다. 어쨌든 힐링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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