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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PD Jun 15. 2023

18년 차 드라마 PD의 단상

2011/03/09

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고, 대단히 재미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18년째 하는 드라마 연출이 할 때마다 재미있고, 긴장되고, 기다려집니다. 시청률이라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가 있고, 작품이 좋았다고 손뼉 쳐 주는 분의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런 냉정함과 따뜻함으로 인해 제가 근무하는 곳은 쓸데없는 잔머리나 정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드라마에 전념하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 한 저의 사적 영역과 자존심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세상 많은 직업 중에서 보직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프로젝트(작품)에 집중하려는 사람만이 모인 곳은 많지 않습니다. 실력으로만 판단하는 공정함을 누리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이런 직업에 회의를 느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방송의 특성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 때입니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한 시간만 더 있었으면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이야기로 바꿀 수 있을 텐데'하고 한탄을 하지만, 언제나 그 하루, 한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 부족한 한 시간 때문에 드라마를 제대로 깊지도 못하고 누더기인 채로 내던지듯 시장에 팝니다. 그런 부끄러움을 매 작품 겪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TV 드라마는 '혼이 없다', '너희는 양아치다'라고 비웃을 때 감히 항변하지 못합니다.


주위에서 추문이 터질 때입니다. 며칠 전부터 다시 죽은 장자연 양의 편지가 보도되고, 그녀를 착취했던 이름이 가십거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연기자로서 성공하길 바랐던 한 여배우의 미래가 훼손되었습니다. 저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양지(陽地)에 있는 사람이라 음지(陰地)의 일을 잘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어느 연예인이 그런 욕망의 사다리를 딛고 정상에 올랐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매 작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보자.'라는 각오로 덤벼드는 제작진에게, 그런 성공의 급행 코스가 있다는 것은 모욕적으로 들립니다. '한 땀 한 땀'이라는 말이 어느 드라마에서 나왔듯, 드라마와 연기는 한 컷 한 컷 최적의 대본과 연출, 연기자가 힘을 합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한 컷 한 컷' 만들어도 시청자나 관객이 외면하는 냉정함이 이곳에 있습니다. 이런 스캔들이 들리면 '혹시 우리의 세상을 사는 방법이 틀린 것 아닌가' 하는 현기증이 듭니다.


인간관계를 생각할 때입니다.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위치에서 저희는 '을'인 경우도 있지만 '갑'인 경우가 많습니다. 갑에게 친해지려는 '을'은 진심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갑과 을'의 관계가 깨지면 그에 따른 인간관계도 함께 분해됩니다. 인생의 가장 오랜 세월을 직업을 통해 보내고 여러 '갑과 을'이 관계를 맺습니다. 그 오랜 세월 쌓은 인간관계가 이해에 바탕을 둔 모래알 같은 것이라고 느낄 때면 굉장한 회의감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제게 영원히 남을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합니다. 제게는 '드라마가 남을 것입니다.  '한 땀 한 땀'은 아니더라고, 능력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뛰어난 결과를 내려고 합니다. 비즈니스를 인간관계처럼 위장한 허망한 만남으로 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 즐거운 곳', '좋아하는 곳'이 아니면 괜히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런 추문이 나에게도 해당하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려 합니다. 그러나 제가 얼마나 욕망과 유혹에 약한 사람인지 잘 알기에, 드라마 PD로서의 삶이 힘겹고 무겁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쓴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제작 환경은 과거에 비해 좋아졌습니다. 초치기 제작으로 마구잡이로 찍은 드라마를 송출하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거의 해결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는 아직 유효한 것 같습니다. 성공으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타려고 미봉책이나 사술을 쓰려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허망함은 SBS를 나와서 프리랜서가 되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게 한번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좋은 사람이 누군지 걸러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 산업이 팽창하던 시기에 PD가 되어서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런 혜택을 지금도 누리고 있습니다. 복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2023년 11월 1일이 되면 30년 차 드라마 PD로 접어듭니다.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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