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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신선 May 01. 2024

아버지의 변신은 무죄

<高城鄕叟病化魚> 외

아버지의 변신은 무죄


                                             글/하괴저

가장 기묘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모름지기 ‘변신’과 관련된 것들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읽었던 『지킬과 하이드』 동화가 강렬히 기억에 남아있다.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 신화 속 수많은 변신 이야기부터 카프카의 『변신』까지,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모두 ‘변신’이라는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천예록』에도 변신 이야기가 있다. 재미있게도 두 이야기의 구성이 거의 비슷하다. 마치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는 듯, 유사한 흐름의 이야기가 데칼코마니처럼 수록되어 있다. 작가 임방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물고기가 되어버린 아버지
첫 번째 이야기는 「고성의 촌로가 병이 나더니 물고기로 변하다 [高城鄕叟病化魚]」이다. 기묘한 제목이다. 사람이 물고기가 되다니.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몇 해 전, 한 재상이 고성(高城)의 군수로 있었다. 그때 어떤 벼슬아치가 찾아와 그를 뵙겠다고 하였다. 마침 점심때라 군수는 상에 있던 홍어탕(洪魚湯) 한 그릇을 먹으라고 내어주었다. 그런데 그 벼슬아치는 홍어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사양하였다.
“오늘 마침 소반을 들고 온 터라, 이렇게 음식을 내려주셨으나 감히 먹지는 못하겠나이다.”
그러면서 적잖이 슬픈 얼굴을 하더니 이윽고 줄줄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고성의 촌로가 병이 나더니 물고기로 변하다」, 157쪽

벼슬아치에게 홍어탕을 권하였으나 먹지 않았다. 지독한 냄새를 못 버티는 것일까? 갑자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홍어와 관련된 무슨 슬픈 사연이 있나 보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저에게 망극한 일이 있습죠. (…) 저의 부친은 수(壽)를 누리셔서 백세가 다 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열병이나 온몸이 불처럼 뜨겁더니 점점 위중해지셨지요. (…) 그런 며칠 후 병상에 누우신 아버지는 저희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지요.
“내가 열이 많이 나 마음속의 답답함을 견딜 수가 없구나. 집 앞 큰 냇가로 나가 앉아 있고 싶구나. 그곳에 흐르는 물을 보면 병이 나을 것 같은데……. 너희들은 내 뜻을 막지 말고 어서 나를 업고 강가로 나가자꾸나.”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고성의 촌로가 병이 나더니 물고기로 변하다」, 158쪽

벼슬아치의 아버지는 무려 백 세에 달하는 정정하신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안 그래도 편찮으셔서 정신이 없는데, 아버지가 자신을 강가로 데려가달라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아버지의 부탁이라 해도 노환의 병자를 밖으로 함부로 데려갈 수 없는 법. 자식들은 안 된다고 아버지를 타일렀지만, 아버지는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을 죽이는 것과 진배없다고 하며 화내었다. 아버지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은 아버지를 이끌고 냇가로 가게 된다.

“이 맑은 물을 보니 열이 벌써 내려간 듯하구나.”
그렇게 한참을 앉아 계시더니 저희들에게 다시 말씀하시더군요.
“혼자 앉아 흐르는 물을 보고 싶구나. 남이 옆에 있는 게 귀찮아. 너희들은 잠시 저 숲 속으로 가 있다가 내가 부르거든 다시 오너라.”
우리들은 안 된다며 애써 여쭈었으나 아버지는 다짜고짜 화를 내며 고집을 꺾지 않으시더군요.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고성의 촌로가 병이 나더니 물고기로 변하다」, 158쪽

아버지는 흐르는 물을 보고 병이 씻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리던 고향에 온 것처럼. 자식들은 이상함도 느낄 새도 없이 아버지에 의해 쫓겨났다. 아버지는 왜 물가에 오고 싶으셨을까. 왜 혼자 있고 싶어 하실까. 같은 의문 반, 아버지에 대한 걱정 반으로 자식들은 숲 속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병중인 아버지를 홀로 둘 수 없는 법이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런 자식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사뭇 기괴한 것이었다.

… 앓으시던 아버지는 옷을 벗고 물로 들어간 상태였지요. 이미 몸 전체가 홍어로 변하고 있었는데, 반은 물고기로 반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어요. (중략) 다시 보았을 땐 아예 물고기로 변해 버렸더군요. 큰 홍어 한 마리가 팔딱거리며 강물 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득의에 찬 모습으로 꽤 기뻐하더군요. 저희를 보면서 헤어지기 섭섭했는지 차마 버려두고 떠나가지 못하겠다는 기색이었어요. 그러나 이윽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더군요. 저희 모두 강가를 따라 내려갔는데 아예 큰 바다로 들어가 다시 보이지 않았답니다. 아버지가 물고기로 변한 자리엔 벗겨진 머리털과 손발톱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지요.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고성의 촌로가 병이나더니 물고기로 변하다」, 158~159쪽

아버지는 갑자기 홍어로 변해버렸다! 아버지는 홍어가 되고자 자식들을 숲 속으로 보낸 것이었을까. 자식들은 너무 놀랍고 해괴하여 아버지임에도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한 마리의 홍어가 되었다. 인간에서 미물이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기뻐 보였다. 인간일 적 기억이 있는 것인지 자식들을 바라보았지만, 그것도 잠시 큰 바다로 떠내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변한 자리에는 머리털과 손발톱뿐만 남아있었기에 그것으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기묘한 일을 겪은 아들은 그 후로 홍어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멧돼지가 되어버린 아버지


승평(昇平) 김상공(金相公), 김유(金瑬)의 집안 사람 중 먼 시골에 사는 백 세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김상공의 집에 찾아와 비밀스럽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밤이 되어 손님이 물러가고 주위 사람들까지 모두 물리쳐야지만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 여간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보다.

“저희 아버지는 춘추가 저렇게 높아도 평소에 병 한번 걸린 적이 없었습죠. 그런데 어느 날 저희들에게 이렇게 얘기하시더군요. ‘내 오늘 낮잠을 자려고 하니 너희들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거라. 경솔하게 문을 열고 들어와선 안 되느니라. 내가 부르거든 그때 문을 열도록 하여라.’”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승평의 집안 사람이 늙어서 멧돼지로 변하다」, 160쪽

우리는 이미 홍어가 된 아버지를 봐버렸다. 그렇기에 말의 저의가 무엇인지 안다. 아버지는 다시는 아들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다른 존재로 변신할 것이다.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아들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몰래 엿보니 아뿔싸, 아버지는 이미 한 마리 큰 멧돼지로 변해있었답니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 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니 멧돼지가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벽을 부딪쳐 뚫고 나가려고 요동을 치고 있었지요.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승평의 집안사람이 늙어서 멧돼지로 변하다」, 161쪽

아버지는 멧돼지로 변해버렸다. 그의 아들이 김상공의 집에 찾아온 이유는 아버지의 처우를 의논키 위해서였다. 멧돼지가 된 아버지를 집에서 기르자는 의견과 묻어서 장례를 치르자는 의견 등이 있었으나 아직 아버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들은 먼 시골에서 김상공이 사는 집까지 달려왔다.

“이 일은 만고에 없던 변고이니라. 따라서 나도 합당한 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만, 굳이 내 생각을 말하자면 비록 이물로 변하였지만 죽기 전에는 늙었다고 땅에 묻어서는 결코 안 될 줄로 아느니라. 그렇다고 사람이 아닌 이상 집안에 두고 보살핀다는 것도 또한 안 될 일이지 않느냐? 하물며 매번 뛰쳐나가려고 한다니 ……. 산과 숲은 바로 그가 살 토굴이 될 것이니, 큰 산속 인적이 드문 곳으로 떠메어다 버리는 것이 이치에 합당할 듯하구나.”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승평의 집안 사람이 늙어서 멧돼지로 변하다」, 161쪽

흔히 있는 일, 아니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니었기에 김상공은 놀랐지만 그를 위해 해결책을 일러주었다. 죽지 않은 이를 매장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고 사람이 아닌 이상 집안에서 보살피는 것도 무리이니 차라리 그가 원하는 데로 산에 풀어주라는 것이다. 멧돼지이니 산이 곧 그의 집이 될 터이니 그것이 이치에 합당할 것이라고 일러주자, 아들은 이를 옳게 여겨 그렇게 하고 아버지가 변신한 그날을 기일로 삼았다.
이 이야기를 엮은 임방은 이렇게 적었다.

…… 지금 고성의 늙은이와 승평공 친족의 일을 접하고서 깊이 따져보니 만물이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겠다. 참새가 두꺼비로 변하고 꿩이 이무기로 변하며, 쥐가 메추라기로 변하고 개구리가 게로 변한다 하는데, 사람도 만물의 하나일 뿐이니 어찌 저 혼자만 변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는 일상의 이치가 아님은 분명하다. 아무래도 변괴로 돌릴 수밖에.
임방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승평의 집안 사람이 늙어서 멧돼지로 변하다」, 162쪽

아버지의 변신은 무죄
아버지들은 어째서 변신하였는가. 천예록 이야기 속 아버지들의 변신은 우리가 알던 것들과 사뭇 다르다. 그들은 인간에서 미물로, 즉 하강 변신하였다. 타 설화 속 하강 변신을 한 번 살펴보자. 「선녀와 나무꾼」 속 나무꾼의 ‘수탉 변신’은 징벌로서의 변신이고 「장자못 설화」의 며느리 역시 금기를 여긴 것에 대한 징벌로서의 변신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자의로, 나아가 자신의 욕망으로 미물로 변신하였다. 마치 「단군신화」 속 웅녀가 품은 상승 변신의 욕망처럼 말이다. 어째서 아버지들은 미물로 변신할 욕망을 품었을까. 아버지의 욕망일까? 혹은 자식들의 욕망일까?
두 이야기는 모두 아들의 입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기억 속 아버지들은 모두 나이에 맞지 않게 정정했다. 아버지가 연세가 지극함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임은 자식들이 그를 그러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연로한 아버지의 모습이 정정한 이유와 아버지가 미물로 변한 까닭이 모두 자식들의 욕망에 있는 것이다.
정정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미물로 변하였다. 미물로 변함은 곧 죽음과 다름없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미물로서 살아간다’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식은 아버지가 너무 그리워 이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 아닐까. 아버지를 짐승의 모습으로 박제할 정도로 그리워하고 그를 홍어를 먹지 않을 정도로 기리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다. 결국 아버지를 변신시킨 것은 자식들의 그리움에서 비롯된 욕망이다. 마치 웅녀가 인간으로 변신하고 싶듯이 자식은 아버지를 변신시키고 싶은 것이다.
혹은 아버지의 지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천예록』은 양난 이후에 쓰였다. 혼란스러운 시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아버지의 신비로운 변신은 이 때문에 일어난다. 정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버지의 위엄을 높이고 다른 존재로의 변신은 신비함을 더한다. 천예록이 쓰일 당시에 어지러워진 사회를 바로잡고자 아버지의 위상을 높이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것이리라 추측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은 어떨까. 우리는 가정 내 아버지와 대화 시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려주는 기사를 자주 접해왔다. 옛날 집안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는 어느새 소외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세월 혹은 아버지만의 탓은 아닐 것이다. 자식들인 우리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아버지를 어떠한 모습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어렸을 때 보았던 아버지의 웅장한 모습과 지금 바라본 초라한 모습, 사랑받았던 순간들과 잊고 싶은 순간들 모두가 파편처럼 기억 속에 흩어져 있다. 이들을 모두 하나로 묶는 것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으로 묶인 순간순간들이 아버지를 새로운 모습으로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변신한다. 자식들의 욕망, 그리움에 따라. 그렇기에 아버지의 변신은 무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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