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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이 궁금한 호랑이’를 응시한 국문학도의 보고서:

전건우, 『어두운 물』을 통해 본 〈호랑이와 곶감〉 모티프의 전변(轉變)

by 용신선


글/ 목화(木火)


어흥!

사납고 무시무시한 맹수,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호랑이는 왜 곶감을 무서워할까? 호랑이가 가진 정보라고는 '호랑이 이야기를 들어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어린아이가 곶감 이야기를 듣고 울음을 그쳤다'뿐인데도 말이다.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는 단순히 알지도 못하는 걸 무서워한 어리석은 호랑이 이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미지(未知)를 무서워하지 않는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워한 호랑이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을 꼬집는다.

두려움은 미지(未知)에서 시작한다. ‘알 수 없다’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비합리적인 불안이다. 책 『스피노자를 찾아서(Looking for Spinoza)』의 저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우리는 숨어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호랑이가 상상한 곶감은 상어 같은 이빨, 사자 같은 발톱, 코끼리 같은 덩치를 가진 무시무시한 괴물이었을 것이다. 곶감을 모르는 호랑이의 상상력은 ‘어린아이가 곶감 이야기를 듣고 울음을 그쳤다.’라는 짧은 사실에 커다란 두려움을 심어준다.

곶감을 모르는 호랑이는 어리석은 게 아니다. 호랑이에게 곶감이 미지의 대상이라면 인간에게는 종교와 무속이 미지의 대상이다. 오컬트란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상상력을 이용하는 장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국 현대 오컬트의 중심은 종교성과 민간신앙이 차지한다. 과학적 방식으로 규명된 근대적 세계가 종교와 무속의 초자연적 현상을 마주하면서 두려움이 발생한다.


곶감을 궁금해 한 호랑이들

가장 원초적인 감정인,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해소되는 방식은 단순하다. 몰라서 생긴 두려움은 알게 됨으로써 사라진다. 호랑이에게 말랑하고 달콤한 곶감을 맛보여 주면 호랑이는 더 이상 곶감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둑한 새벽 강가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가 물살에 떠밀려 온 물미역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매일 밤 무덤가에서 처량하게 손을 흔드는 소복 입은 여인은 최신식 합성 기술을 활용한 조작 영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현대인들의 공포는 종결된다.

전건우 작가의 오컬트 장편소설 『어두운 물』(2024)은 상상 속 곶감이 무서워 도망친 호랑이들이 아닌, 상상 속 곶감을 확인하고자 다가가는 호랑이들이다.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미지를 향해 달려가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독자는 손에 땀 맺히는 긴장감을 느낀다.

‘어두운 물’은 수귀(水鬼)에 대한 제보를 받은 방송국 제작진들로 시작한다. 방송이란,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알려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것이다.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정보 탐색과 확산을, 미지의 분해를 업으로 하는 방송 제작자들을 통해 미지의 공포는 두드러진다. 알아가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이 더 큰 미지로 이어지는 과정이 반복되고, 미지의 두려움과 미지의 탐구가 양립된다.


퉁, 퉁! 미지의 두려움, 미지의 탐구

“퉁. 퉁. 그렇게 문을 두드리는 고것의 정체는 아무도 몰라. 수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럴 때 절대 문을 열어 주지 않아. 그러니까 자네들도 명심해. 누가 한밤에 문을 두드리면 무시하라고. 적어도 우리 마을에선 그러는 사람이 없거든.”

‘어두운 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현천강과 현천강 인근의 현천마을은 그야말로 괴담 그 자체다. 현천마을은 30여 년 전 폭우로 인한 극심한 홍수 피해를 겪었는데, 이때 죽은 사람들이 한 맺힌 귀신이 되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짙푸르다 못해 숫제 검은빛이 도는 현천강 속 수귀가 된 그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산 사람들의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수귀라는 미지의 존재를 파헤치기 위해 마을에 방문한 제작진들은, 가장 기분 좋은 방향으로 그 존재를 상상한다. 사실 수귀는 존재하지 않고, 홍수라는 자연재해에 어울리게 잘 지어진 허구소설이라고 말이다. 수귀의 소문에 대해서도, 현천강이 검은 강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짙은 검은색인 이유에 대해서도 과학적이고 심리 분석적인 근대적 근거들을 들이민다.

“보통은 아주 깊고 넓은 강, 그러면서도 도심에 인접한 한강이나 낙동강 같은 강들이 어두운 색을 띱니다. 물의 탁도를 좌우하는 건 여러 요인이 있는데 말이죠. 수심이 깊을수록 그리고 미생물이 많을수록 당연히 더 탁하기 마련입니다. 한강과 낙동강이 이에 해당하는 거죠.”

“이 강의 경우에는 글쎄요,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아마 무기물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어서 이렇게 어두운 색을 띠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거기에 또 하나, 지금 보이는 강가는 수심이 깊지 않지만 조금만 들어가도 확 깊어질 거예요. 수중 지형이 급한 경사일수록 빛이 투과되는 양이 적어지거든요. 이러면 확실히 사고가 발생할 위험도 커지죠.”

작품 속 지리학 박사 김상수 교수의 말이다. 미지의 끝이 귀(鬼)일 것이라 보지 않는다. 수심과 미생물, 무기물과 빛의 투과라는 근대적 근거가 만들어 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를 기대한다. 그는 수귀에 대한 정체에 대해서도 그런 기대를 가진다.

“사람들은 언제나 논리적인 이유보다 심적으로 납득하기 쉬운 설명에 혹하는 편이죠.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고 물살도 세니 자칫 물에 빠지기라도 했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보다는 물귀신이 끌어당긴다는 설명이 훨씬 즉각적으로 와닿잖아요? 그래야 더 조심하게 되고.”

그래서 비가 오는 날 노크 소리에 반응하지 말라는 충고에도 문을 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른바 공포 종결을 위함이다. “누군지 궁금하잖아요.” 박재민 피디는 말한다. 문을 열어보니 수귀가 아닌 비에 쫄딱 젖은 직장 동료였다거나, 도움 필요한 옆집 노인이었거나. 그가 바라는 상황은 이런 것이었을 테다.

수심과 미생물, 무기물과 빛의 투과, 비에 쫄딱 젖은 직장 동료, 도움 필요한 옆집 노인. 방송 제작진들의 기대는 하나씩 산산조각 나고, 이야기는 종교와 무속의 초자연적 현상 속에서 근대적 세계를 파괴한다. 수귀를 확인하는 과정은 '알 수 없음'과 충돌하는 사건의 연속이다. 그들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대로 견뎌야 하는 두려움을 받아내는 시험에 든다. 물론, 독자도 그 시험에 함께한다.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와 같은 미지의 베일

더 알게 되면 무섭지 않을 것 같고, 이성과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수귀도 별거 아닐 것 같은 이상한 용기가 샘솟는다. 미지의 두려움은 비로소 알고 싶다는 감정에 지배되는 것이다. 방송 제작진들은 미지의 베일을 벗기는 행위에 중독되어, 그만 알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굴레에 빠진다. 벗겨도 벗겨도 나오는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혹은 영원히 깔 수 없는 기괴한 양파(?)마냥... ...

이들과 함께 미지의 수귀를 찾아 탐구하던 독자들에게 ‘어두운 물’은, 끝끝내 합리적 근대 세계를 파괴하고 종교적 무속적 원천을 내보인다. 종교도 무속도 미지로 이어지니 이야기가 끝나도 공포는 계속된다.

다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로 돌아간다. 만약 호랑이가 확인한 곶감이 정말 호랑이의 상상대로 상어 같은 이빨을 가졌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날카롭고 뾰족한 발톱이 보인다면? 울퉁불퉁하고 거대한 몸집을 부풀리며 다가오는 ‘곶감’을 본다면 호랑이는 외칠 것이다. “아이코! 마주치기 전에 도망칠걸!”

‘어두운 물’의 박재민 피디는 외칠 것이다. “아이코! 마주치기 전에 도망칠걸!”*


*미국 보스턴칼리지 철학과의 종교철학자 리처드 커니 교수의 『이방인, 신, 괴물-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고찰(Strangers, Gods and monsters: Interpreting Otherness, 2002)』에는 원주민과 이방인의 첫만남에 관한 짧은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원주민을 본 이방인도, 이방인을 본 원주민도 서로 외치고 만다. 이 역시 '곶감을 본 호랑이의 외침'과 다르지 않다. 우리 안에 곤히 잠든 '타자성'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는 때가 궁금하다면 커니의 저작을 권한다.


【참고문헌】: 전건우, 『어두운 물』, &(앤드), 2024.

● 2025년 11월 15일 원고작성자: 목화 /글 감수: 굴레방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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