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질린 사람들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가지 깊은 공포의 그림자 속에 서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쌓아온 가치와 믿음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무지와 야만이 지배하는 퇴행적 사회로의 전락, 그것은 우리가 맞닥뜨린 가장 큰 위협이다. 두 번째는 더욱 내밀한 공포다.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이 만연해지면서, 우리 스스로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잃어가고 있다는 자각. 그리고 그런 현실과 마주할 용기조차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다.
삶은 끊임없이 풀어야 할 난해한 문제와도 같다. "오늘도 쉽지 않네..."라는 한숨이 무의식 중에 새어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출근길에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차가운 시선 하나에도 마음이 무너지고, 운전 중 갑작스레 끼어든 차 한 대에도 분노가 치솟는다. 이런 일상의 작은 균열들이 모여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와 강연에서는 분노를 다스리는 법,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그토록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고, 그 선택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이런 불안이 일상이 되고, 주변의 부정적 시선과 경험들이 쌓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집단적 이기심이라는 안전한 둥지를 찾아 도피하게 된다. 두려움은 우리의 판단력을 무디게 만들고, 자극적인 선동에 쉽게 휘말리게 한다.
"의무를 완수하기 위한 충성스러운 추종자." 이 말은 얼마나 많은 비극을 정당화해 왔는가. 충성이라는 가치는 그 대상과 목적에 따라 숭고해질 수도, 악마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과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면서까지 추구하는 충성은, 결국 권력이라는 허상을 쫓는 맹목적 폭주에 불과하다. 이런 왜곡된 충성은 추종자들을 광기와 비겁함의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어떤 이들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한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선 이들도 있고, 겨우 그 흐름에서 빠져나온 이들도 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제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다. 그들은 누군가의 자식이고, 친구이며, 부모다. 그런 그들이 어느 순간 자발적 사고를 포기한 군중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은 때로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소수 집단의 이기심을 위한 것이라면, 진정한 변화가 아닌 파괴에 불과하다. 현존하는 질서가 불완전하다면, 우리는 함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극소수의 기득권을 위해 만들어진 질서는 결코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염된 사람들은 왜곡된 가치관을 정당화하려 하고, 때로는 단순한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몇몇의 사악한 기득권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 무엇을 위해? 그들이 옳다고 믿게 된 어떤 이유에서든 깊은 슬픔을 느낀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처럼, 우리 시대의 '무지의 평범성'은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의도적인 무지와 의도 없는 무지는 모두 위험하다. 이러한 무지가 일상이 되면, 그것은 곧 선진 사회의 가치체계를 무너뜨리는 독이 된다. '알고 싶지 않음'과 '알아도 모른 척하기'라는 태도가 개인의 이익과 결합될 때,
모두 길바닥에 누워 비뚤어진 가치관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잠시 멈추어 서자.
깊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편안한 삶인가, 아니면 타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인가?
영향력이라는 이름의 유혹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자.
그리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자.
우리가 걸어온 길이 옳은지,
우리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깊이 생각하고 성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용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