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쓰레기는 그만 만들기

ㄷ ㅣ ㅈ ㅏ ㅇ ㅣ ㄴ ㅓ #9

by Utopian


디자인과 예술


예쁜 쓰레기는 그만 만들기.

디자이너들이 자칫 빠지게 되는 스타일링에 도취한 모양 만들기 더 아름다운 형상을 위한 형상을 디자인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디자이너들은 자칫 이런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는 세상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것이 이익으로 치환되는 세상에서 그래도 옳은 디자인을 해야 하는 가치관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스타일링에서 의미로 디자인의 초점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의미에 찬사를 보내는 디자인 환경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스타일링에서 의미로 — 디자인의 무게중심 이동

왜 스타일링에 도취되는가

디자이너는 태생적으로 시각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평가 시스템 — 어워드, 포트폴리오, 소셜미디어 — 은 거의 전부 보이는 것으로 작동합니다. Behance에서 "좋아요"를 받는 건 아름다운 디자인 혹은 모델이지, 그 제품이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가 아니죠. 욕망이 생기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만드는 겁니다.


스타일이 먼저냐 의미가 먼저냐의 문제는 사실 프로세스의 순서 문제입니다.

가장 강력한 전환은 "이게 없으면 누가 고통받는가?"라는 질문을 디자인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형태가 아니라 결핍에서 출발하면, 스타일은 자연스럽게 의미를 따라옵니다. Dieter Rams의 작업이 아름다운 건 아름다우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기능과 맥락에 충실했기 때문이죠.

또 하나는 시간축을 늘리는 것입니다. 출시 순간의 반응이 아니라, 5년 뒤 그 물건이 어디 있을지를 함께 설계하는 것. 스타일에 도취된 디자인은 대개 6개월 뒤 쓰레기통에 있습니다.


의미에 찬사를 보내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이게 더 어렵고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인의 각성만으로는 구조를 못 바꾸니까요.

평가 기준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어워드가 "얼마나 오래 쓰였는가", "얼마나 수리 가능한가", "누구의 문제를 실제로 풀었는가"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면 문화가 달라집니다. 일부 Good Design Award나 Index Award가 이 방향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Behance의 알고리즘을 이기진 못하고 있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크리틱을 할 때 "예쁘다"와 "왜 이게 필요한가"를 동등한 무게로 다루는 것. 그리고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서도 디자이너가 왜 를 물을 수 있는 계약 구조와 신뢰를 만드는 것.

결국 이 문제는 디자이너 개인의 윤리이기도 하지만, 디자인을 평가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안목을 함께 키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좋은 디자인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의미 있는 디자인이 살아남는 시장이 만들어지니까요. 그리고 보기 좋은 것에 먼저 끌리면 평가의 가치관은 이미 기울어집니다. 본능이죠.

특히나 Ai가 만든 이미지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비판도 하겠지만 분명 충격적입니다.


디자인의 가치가 바뀌고 있다는 말들을 지난 수십 년간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기술이나 도구의 개선에 의한 스타일링의 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자동차 디자인 분야로 보자면 테슬라는 분명 자동차브랜드이지만 그들의 디자인 특히나 스타일링에 대해서는 평가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 기능성과 기존의 운전자 위주의 차량에서 자율로 이동하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가치를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 의미는 아직 정의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이미 정의되었는데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의미가 스타일을 앞서는 순간

테슬라는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줍니다. 디자인 비평가들이 "밋밋하다", "특징이 없다"라고 말하는 그 차가,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차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차의 표면이 아니라 그 차가 대표하는 전환에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단순히 "기능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패러다임이 바뀔 때 기존의 미적 문법이 무효화된다는 겁니다.

마차에서 자동차로 넘어올 때도 똑같았습니다. 초기 자동차는 "없는 말"처럼 생겼습니다. 마차의 미학을 기준으로 보면 흉물이었죠. 그런데 그 흉물이 새로운 미학의 기준이 됐습니다.


"아직 정의되지 않은 의미"라는 것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자율주행으로 가는 전환기에서 차 안의 공간은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운전자가 없는 공간. 앞을 볼 필요가 없는 공간. 그러면 대시보드는 왜 거기 있어야 하는가. 시트는 왜 앞을 향해야 하는가. 창문은 왜 그 크기여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아직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자동차 회사들이 하고 있는 건 기존 차의 인테리어에 스크린을 더 크게 붙이는 것입니다. 이건 마차에 엔진 달던 시절과 똑같은 실수입니다.


이미 정의됐는데 우리가 못 보는 것

이 관점도 날카롭습니다. 몇 가지 후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목적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시간 자체가 생산적이거나 회복적인 시간이 되는 것. 그러면 차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이동하는 방입니다. 그 방을 우리는 아직 자동차처럼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소유에서 경험으로의 전환도 이미 진행 중입니다. 차를 소유하는 사람이 줄어든다면, 차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스타일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개인 정체성의 표현 도구로서의 자동차 디자인 문법 전체가 흔들립니다.


즉, 지금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경험을 먼저 감지하고 그것에 형태를 주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그게 진짜 어려운 이유는,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여기에서 기능에 의한 그렇게 생겨야 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이 경쟁의 도구였다면 아예 이런 필요가 사라진 디자인은 예술의 경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전자제품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면 가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자동차는 집이 되고 혹은 어떤 덩어리가 되고 제품은 생산성에 의한 제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될 것입니다.


경쟁이 사라질 때 남는 것

기능이 충분히 해결되고, 기술이 보이지 않게 되면 — 그 물건은 더 이상 "무엇을 하는가"로 정의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바로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입니다. 예술은 처음부터 기능의 필요 없이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왔습니다. 디자인이 기능의 압박에서 벗어날수록,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왜 이 형태인가. 이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자제품이 가구가 된다는 것

가구는 흥미로운 물건입니다.

가구는 기능이 있지만, 우리는 가구를 기능으로 고르지 않습니다. 의자는 다 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의자는 방에 들어오는 순간 공간의 의미를 바꿉니다. 그 의자가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언입니다.


Bang & Olufsen이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제품은 오디오 기기이지만 아무도 스펙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벽에 걸린 Beosound는 꺼져 있을 때 더 아름답습니다. 기능이 꺼진 자리에 오브제가 남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지 고급화가 아닙니다. 기술이 투명해지는 민주화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모든 냉장고가 충분히 차가워질 때, 냉장고는 주방의 조각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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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가 집이 된다는 것

자동차가 집이 된다면, 자동차 디자인의 레퍼런스는 더 이상 자동차가 아닙니다.

건축이 됩니다. 그리고 건축에서 가장 오래된 질문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공간 안에 있을 때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

르 코르뷔지에가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했을 때, 그건 기능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건축은 백 년 동안 그 기계성을 넘어서려 했습니다. 자동차는 지금 그 출발점에 서 있는 겁니다.


제품이 오브제가 될 때의 책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긴장이 생깁니다.

오브제는 침묵합니다. 오브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브제는 그냥 존재합니다. 그 존재가 의미를 발생시킵니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의미를 설계하는 사람이 됩니다. 기능을 설계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건 훨씬 더 무거운 일입니다. 기능은 맞고 틀림이 있지만, 의미는 디자이너의 세계관이 그대로 물질이 되는 것이니까요.

예쁜 쓰레기를 만들지 말라는 처음의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연결됩니다. 오브제가 된 제품은 더 오래 살아남습니다. 더 강하게 공간을 점유합니다. 그만큼 만드는 사람의 철학이 세상에 더 오래 남습니다.

그게 디자인이 예술의 경계에 가까워질 때 생기는 자유이자,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윤리입니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철학이 개입하게 됩니다. 오 이래야 하는 거야? 언제까지 이걸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저런 기능과 조건을 맞춰 만드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 자체의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디자이너가 장인에서 작가가 되는 순간입니다.

조건을 맞추는 사람에서 의미를 만드는 사람으로

브리프를 받아서 조건을 충족하는 것. 그건 훌륭한 기술입니다. 그런데 그건 결국 남의 질문에 답하는 일입니다. 클라이언트의 질문, 시장의 질문, 트렌드의 질문.

작가는 자기 질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질문이 작업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충분히 깊으면, 답으로 나온 물건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거기 있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말합니다.

"언제까지 이걸 만들어야 하나"는 사실 가장 정직한 질문입니다

그 피로감이 중요합니다. 그게 단순한 번아웃이 아니라면, 그건 자기 안에 다른 질문이 생겼다는 신호입니다. 더 이상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된다는 것.

그 불만족이 철학의 시작입니다.


철학이 개입한다는 것의 실체

철학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단순합니다.

이게 세상에 있어야 하는가. 있다면 왜인가. 그 이유가 나한테서 나오는가.

이 세 질문에 자기 언어로 답할 수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은 제품이 아니라 발언이 됩니다. 그 발언이 물질의 형태를 빌린 것이 진짜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정적 조건, 생산 조건, 클라이언트 조건 — 이것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철학이 있는 디자이너는 그 조건들을 제약이 아니라 저항으로 씁니다. 저항이 형태를 만들기도 하니까요.

결국 가장 어려운 건 기술도 조건도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는 디자인 철학이란 한 기업이 대표하는 디자인의 방향성을 넘어서 각 개인 디자이너에게 직접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너는 왜 디자인을 하는가?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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