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선택
대학 졸업 후 우연한 계기로 홈쇼핑 전문 게스트 일을 하게 됐다. 쇼핑호스트 옆에서 상품을 전문적으로 설명해주는 역할이다. 실제 업체 직원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나처럼 전문가인 척 썰 잘 푸는 사람이 이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 일이 내 적성에 무척 잘 맞는구나 느끼고 있던 차에 C홈쇼핑 방송팀장으로부터 고정 게스트 제의를 받았다.
고정적인 방송 물량과 수입을 확보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마침 L홈쇼핑에서 쇼핑호스트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정식 쇼핑호스트가 되고 싶었다. 인이어를 끼고 방송을 진행하고, 방송용 메이크업을 받고 협찬용 의상을 입고 폼나게 상품을 설명하는 쇼핑호스트가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이미 행복해하고 있었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때론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만든다고 난 쇼핑호스트 합격자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합격과 동시에 교육이 시작되었고, 동기들과의 경쟁도 시작되었다. 방송팀장은 너희들은 아직 정직원이 아니고, 인턴 생활 10개월을 거친 다음, 운명이 갈리게 될 거라는 말로 합격의 기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동기들은 4개 조로 나누어졌고, 각 조는 매출경쟁에 돌입했다.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가 속한 D조는 매출 꼴찌를 기록했고, 나는 탈락자가 됐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송별회를 하고, 세상 누구보다 쿨한 척 작별 인사를 한 뒤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집어탔다. 가증스러운 미소로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눈물 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엉엉 울었다.
두꺼운 커튼으로 창문을 다 가리고 밤낮없이 잠만 자며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회사 사람들로부터 위로 전화를 받는 것도 엄마의 걱정과 격려가 섞인 전화를 받는 것도 다 귀찮았다.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오라는 누군가의 말에 마법이 걸린 듯 유럽 배낭여행 가이드북과 유레일패스, 항공권을 구입하고 무작정 공항으로 갔다. 어설픈 위로와 격려 따위 들을 수 없는 곳이면 좋았다. 대학 다닐 때 꼭 가고 싶었던 배낭여행이었는데 97년에 IMF가 터지면서 환율이 2200원까지 치솟는 걸 보고 그 꿈을 구겨 넣어야 했다. 그렇게 원했던 쇼핑호스트의 꿈이 와장창 깨지고 나니, 나의 미래를 계획하는 뇌의 어떤 부분도 와장창 무너져 내린 느낌이었다. 그나마 여행이라도 가겠다는 욕구가 생겼다는 게 다행일 정도로 내 심리적 상태는 처참했다.
남들은 패키지로 혹은 철저한 준비로 떠난다는 유럽 배낭여행을 이렇게 즉흥적으로 와버렸으니, 하루하루가 스펙타클 어드벤쳐였다. 숙소도 그날그날 내가 알아서 구하고, 어디에서 얼마나 머무를지를 내 마음대로 정했다. 패키지였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난생처음 유럽에 왔으니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고, 한국인이고 외국인이고 도움이 필요할 땐 무작정 말을 걸 수밖에 없었다. 친구와 같이 왔으면 아마 이럴 필요까진 없었을 거다. 여행을 좀 하다 보니 무모하다 싶었던 내 결정이 매우 잘 된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 나라마다 꼭 하고 싶은 한 가지를 정해놓고 다녔다. 영국에서는 뮤지컬 보기, 벨기에에서는 초콜릿과 홍합요리 먹기, 네덜란드에서는 온갖 치즈 다 먹어보기, 독일에서는 지역마다 하우스 맥주 마시기, 체코에서는 오페라 보기, 그리고 스위스에서는 번지 점프하기.
스위스 루체른 호텔 인포메이션에 가서 번지점프하고 싶다고 하니까 직원이 대뜸 “Are you crazy?”란다. 얼마 전에 사고 나서 여행객 한 명이 죽었다나. 호텔에 있던 한국 애들한테 같이해보자고 했더니, 여기 번지점프는 우리나라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고 절대 안 할 거란다. 할 수 없이 이벤트 업체에 전화를 걸었더니 5명 이상을 모아 와야 인터라켄역으로 픽업을 나가겠다고 한다. 능숙하지 못한 영어였지만 “나 혼자야. 그런데 번지점프는 너무 하고 싶어. 너희 단체 손님 받을 때 나 한 명 끼워주면 안 돼?” 그러자 미국 칼리지 학생팀에 낄 거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당연 오케이!
영어로 시끌벅적한 버스에 올라탔더니 질문이 쏟아진다. 너 여기 왜 탔냐? 어디서 왔냐? 혼자 다니냐? 에잇. 영어 좀 열심히 할 걸. 짧고 간단한 대답으로 더 이상의 질문을 차단하고 번지점프대로 올라갔다. 앞에 있던 미국 남학생 2명이 덜덜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뒤돌아 온다. 도저히 못 뛰어내리겠는지 돌아서는 애들이 더러 있다. 어, 이거 뭐지? 이러다 나도 못 뛰어내리는 거 아닌지 겁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 앞에 있던 여학생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지자 내 뒤에 있던 애가 “쟤 내 친구인데 우린 어제 스카이다이빙 했다~” 고 자랑질이다. 야! 난 번지점프도 태어나 처음이거든. 심지어 한국에서도 한 번도 안 해 봤다고 이것들아~!
번지점프대 끝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한 걸음당 족히 5년 분량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필름처럼 지나가는 나의 일생. 타임머신까지 태워주는 번지점프라니. 혹시라도 끈이 끊어지면 그냥 죽는다. 아래는 물도 아니고 100M 기암절벽이다. 죽기 딱 좋은 최고의 절경이다. 이래도 뛸래? 여기서 죽어도 후회 없는 거지? 그 한걸음에 이렇게 많은 생각과 질문이 가능하다니. 나 월드컵의 나라 한국에서 왔다고 다 말해버렸다고. 나라망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 떠밀려서라도 해보고 싶었다.
“Please, count for me”
“Okay~Yeh~!!”
당연히 10부터 세주겠거니 심호흡을 하려는데, 이것들이 Five부터 시작한다. 이럴 수가. 망설일 겨를조차 허용하지 않는 단 5초의 카운트.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용기를 발바닥에 끌어다 모았다. One!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나의 대뇌는 발바닥에게 명령한다. 당장 점프대에서 뛰어내리라고.
너무 빠른 속도로 떨어지니 악! 소리도 지를 수가 없다. 읍! 하고 아래의 바윗덩어리를 째려볼 뿐이다. 그리고 와이어에 탁! 하고 걸리는 순간, 붕! 하고 새처럼 날아오른다. 그제야 꺅!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고는 “아하 하하하하!!”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다행히 끈이 끊어지지 않아서, 죽음까지 상상했던 콩알만 한 내 간이 너무 귀여워서, 나름 사우스 코리아의 국격을 드높여서, 혼자 스위스까지 와서 번지점프를 해낸 나 자신이 몹시 기특해서. 웃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 악명 높은 스위스의 번지점프를 해내고 나니 남은 여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엄청난 양의 베짱이 내 안에 가득 충전된 느낌이었다. 짧은 영어였지만 홀로 배낭여행 온 외국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헝가리, 페루, 일본, 호주, 싱가포르 등의 여행객들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가끔 한국말이 하고 싶어 지면, 한국 애들한테 가서 “안녕하세요?” 하며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혼자 여행 온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자유를 원 없이 누린 45일이었다. 가을에 떠났었는데 어느새 겨울이다. 한 달 반의 부재와 연락 두절로 인해 이곳에서의 내 일상은 말도 못 하게 헝클어졌지만, 난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모아 다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용기를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번지점프대에 서서 발바닥에 끌어모은 용기가 족히 몇 년치 용량은 되었나 보다. 번지점프대에서 뛰어내린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4개월 뒤 2003년 2월. 투니버스 성우 공채 소식을 들었다. 내세울 만한 연기 경력도 없었고, 성우 시험을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했기에 솔직히 자신이 없었지만, 용기를 냈다. 떨어지면 어떠하리. 또 다른 길이 열리겠지. 그리고 2월 27일, 내 생일에 투니버스로부터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CM송가수, 전문MC, 리포터 등의 다양한 직업을 거쳐 마침내 성우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봐야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과 만나게 되나보다. 올해로 성우 15년 차다. 난 쇼핑호스트 역할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성우로 정평이 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