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고 나쁘고 나쁘다
누나, 나 먼저 장가가도 돼?
어? 어~그럼, 내가 언제 못 가게 했냐? 오~축하해
내가 33살 무렵이었나? 막상 동생이 나를 추월한다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때까지 결혼 생각 1도 없던 나였지만,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동생 녀석이 여자랑 살림을 차리겠다는 선언에 일단 걱정이 앞섰다. 회사 대리 월급이라는 게 빤한 건데 뭔 돈으로 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이럴 때 우리 엄마, 아빠가 “아들아 널 위해 우리가 집을 한 채 해놨단다” 라며 멋있게 재산 좀 있는 부모의 포스를 팍팍 뿜어주시면 좋으련만. 이분들은 모아놓은 재산은커녕 있던 것도 야금야금 다 까먹은 분들인지라, 그런 기대는 동생도 이미 접은 터였다.
‘장가가도 되느냐’는 물음에는 ‘장가가게 도와줘’라는 간절한 요청이 깔려있었음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동생이 작은 다세대 전셋집을 얻는다해서 전세자금 대출을 해줬다. 내 통장에서. 동생은 이자까지 쳐서 원리금을 상환하겠다고 하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두세 번 입금하고 끝이었다. 앞으로 아이도 낳으면 아무래도 자가용이 필요하겠다 싶어 당시 내가 타고 다니던 하늘색 SM3도 동생에게 넘겨줬다. 내 첫 차였는데... 옛다. 결혼 선물이라니까 동생이랑 올케가 엄청 좋아했다.
[동생과 2006년 생일날]
큰누나 언제 집에 와?
.... 일주일만 기다리면 돼...
병원에서 다 나으면 올 거야
삼 남매였던 우리가 남동생과 나, 둘만 남게 된 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초3이었던 동생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흰 눈이 펑펑 내리던 그해 1월 8일. 언니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엄마는 충격으로 쓰러졌고, 아빠는 장례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언니의 죽음은 10살짜리 여자애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언니가 응급실로 실려 가는 걸 봤던 동생이 ‘큰 누나는 언제 집에 오느냐’고 물었다.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눈싸움을 하다 들어온 동생의 볼때기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기다 대고 도저히 큰누나의 죽음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나도 놀랍고 무섭고 덜덜 떨렸지만, 눈물을 꾹 참고 거짓말을 했다. 큰누나 병원에서 다 나으면 집에 올 거라고. 일주일만 기다리면 된다고.
그 이후로 동생은 왜 큰누나가 집에 안 오냐고 나에게 다시 묻지 않았다. 한 십 년쯤 지나 동생과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을 기다려도 한 달을 기다려도 큰누나가 안 와서 이상했다고. 동생은 큰누나 물건을 정리하던 그 날, 엄마가 하염없이 울고, 아빠도 뒤돌아서 울고, 작은 누나도 훌쩍훌쩍 우는 걸 보고 큰 누나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갔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우리 언니, 나, 내 동생 어릴적]
4살 위였던 언니는 항상 동생들 잘 챙기는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는 그야말로 완벽한 캐릭터였다. 그에 비해 나는 샘 많고, 신경질적이고, 독립적이고, 고집 센 이 집의 트러블 메이커였다고나할까. 당연히 동생은 큰 누나를 더 따랐고, 나 역시 아들이라고 막내라고 특별하게 취급되는 동생이 못마땅했다. 그런 관계 속에서 덜렁 둘만 남게 되었을 때의 어색함이란. 언니의 죽음 이후로 우리 가족은 해마다 가던 피서를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5명이던 가족이 이제 4명뿐임을 확인하게 되는 자리는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자주 하던 외식도 하지 않았고, 아빠는 하는 일마다 안되기 시작했고, 우리가 살던 집의 크기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과 불안함은 언니가 사라진 이후 더 무겁게 우리 집에 맴돌았고, 우리 가족은 한 공간에서 생활했지만, 각자의 모서리에 틀어박혀서 각자의 방식으로 언니를 보낸 슬픔을 이겨내고 있었다. 난 비록 언니처럼은 못할지라도 우리 집 '까불이' 막내를 잘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었다. 남겨진 사람이 감당해야 할 책임감이었나보다. 내 학비 벌어 대학 졸업하기도 바빴지만, 알바해서 번 돈으로 동생 옷도 사주고, 용돈도 주고, 등록금을 보태주기도 했다. 이제 우리 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유쾌한 내동생 용준이와 함께]
어느덧 조카가 둘이나 생겼다. 원래 애들을 별로 안 좋아했지만, 동생의 DNA를 가진 핏줄이라 생각하니 싱글 고모의 지갑이 마구 열렸다. 몇 년 후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각자 육아로 정신없이 살다 보니 동생과 전화통화하는 것도 뜸해졌다. 명절이나 기념일에 동생을 만나보면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촐싹대던 ‘까불이’는 어디로 가고, 애들하고 놀아주는 것도 체력이 달려서 힘들다고 투덜대는 ‘아저씨’가 있었다. 나는 점점 아저씨로 진화하는 동생한테 동네 뒷산이라도 오르라고 잔소리를 해댔고, 옆에 있던 올케가 오빠는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밖에 안 한다며 고자질을 했다.
언니 저희 왔어요
어~어서 와~잘 지냈어?
이번 추석에도 온 가족이 판교로 모였다. “언니 저희 왔어요” “어~어서 와~잘 지냈어?"
동생이 없는 동생네를 맞이하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이제는 넷이 아닌 셋이 된 동생네를 맞이하는 추석이 벌써 3번째인데, 아직도 “누나 늦었어! 미안~”하고 동생이 뒤따라 들어올 것만 같다.
동생은 3년 전 담도암 4기 판정을 받았다. 한 달 동안 기침이 계속돼서 응급실에 들어가 CT를 찍었는데 간의 3분의 1 정도가 암덩어리로 뒤덮여 있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던 건 이미 암이 폐로 전이됐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투병 10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젊을수록 암세포가 더 빨리 퍼질 거라는 의사의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 무시무시한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데. 대체 어디에 암덩이가 있다는 거야? 응?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동생은 젊으니까 암세포와 더 잘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정말 동생은 최선을 다했다. 의사가 말한 4개월보다 6개월을 더 버텼으니까. 동생은 올케와 어린 아들, 딸을 남겨두고 그렇게 짧은 삶을 마무리했다.
[보성에서 투병중이었던 내 동생]
이제 나 혼자 남았다. 나쁜 놈. 나만 혼자 남겨두고 큰누나 곁으로 훌쩍 가버리다니. 건강검진만 제대로 받았어도 몸속의 암 덩어리가 그렇게 크게 자라지 않았을텐데. 회사에서 매년 받았다는 건강검진에 초음파조차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할 때 내가 분명히 운동이라도 하라고 했었고, 피곤이 풀리지 않는다고 할 때 잘 좀 챙겨 먹고 병원에 좀 가보라고 했었는데. 애를 둘이나 낳아 놓고서 어떻게 그렇게 자기 건강을 안 챙길 수 있는 건지. 지금도 돌이켜봐도 답답하고 화가 난다.
마음의 준비를 전혀 못 했던 언니의 죽음도,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던 동생의 죽음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두 번째니까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조카랑 올케는 내가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어쩌지. 실은 나 살기도 바쁜데... 엄마도 너 나쁜 놈이란다. 부모 앞서간 불효자식이라고. 자식의 영정사진 앞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엄마의 모습을 30년 만에 또 보게 만들다니. 이게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놈이 할 짓이냐. 나한테 이 짐을 다 지우고 어떻게 그리 편안한 얼굴로 떠날 수 있는 건지.
꿈에라도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한마디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한 번을 안 찾아오니. 아무리 가족 간이라지만 넌 너무 경우가 없다.
에라이 나쁜 놈.
나쁘고 나쁘고 나쁘다.
거기서 잘 먹고 잘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