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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태 Nov 23. 2023

우주의 눈 (Cosmic Eye)

나는 누구인가?

우주란 시간과 공간의 총체라고 하지요. 

내가 보는 우주는 모두 과거의 모습인지라, 

각 별의 위치에 따라 빛을 통해 내게 보내진 모습은 이미 영겁의 세월이 흘렀건만,
우주는 한 하늘로 어우러져 과거의 우주가 현재의 나와 함께하니, 

미래의 나 또한 다른 모습으로 함께 하게 되겠죠.


138억 년 전 한 점에서 시작된 우주의 첫 하늘이 열리고(빅뱅),

점이 점으로 이어져 은하계를, 태양계를, 그리곤 마침내 지구별로 이어져 왔다 하지요.


46억 년 전 지구가 생겨나고,

35억 년 전 이 땅에 최초의 생명이 시작된 후,

600백만 년 전, 유인원에서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확률의 신비를 통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했으니,

이토록 놀라운 인연을 통해 이어져온 업식(DNA)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나를 이루는 흙, 물, 불, 바람 (地, 水, 火, 風)이라는 4대 원소는 나의 생과 인연 되어 나의 일부를 이루다,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다른 형상으로 이어져 가니,

무엇이 나란 놈인가?


나라 불리는 몸속 구조 또한 대우주의 구성과 별 다름이 없이 99.99%가 텅 빈 원자로 구성되어 텅 빈 공간인 듯하다가도, 인연 따라 무엇인가로 이름 지어지고 모양 지어져 나타나니, 

나와 우주의 원리가 다르지 아니하네. (法性圓融無二相, 色不異空 空不異色)


지금 이 순간이 이어져, 이 생의 백 년을 이루고,

먼 할아버지 적부터 이어져 와서 내 자식, 내 손자로 이어져 갈 수백만 년의  시간을 두고 보면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지요. (진화의 과정)


한 순간, 단 하나만이라도 멈춤과 알아차림에서 비롯된 바른 습관으로 선업을  이어간다면 언젠가는 진정한 깨달은 자로 자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내일 인류의 종말이 올 지라도 지금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 고 했나 봅니다.


지금 내 모습이 변한다고, 

나를 구성한 원자가 사라진 것도, 새로 생겨 날 것도 아니니

어디선가 또 다른 모습을 이루어 이어져 갈 터이니,

영겁의 세월 동안 쌓인 먼지일 랑 훌훌 털어내고, 

좋은 기운들로 차곡차곡 다시 쌓아가는 즐거움을 누려봅시다.


저 멀리가 아니라, 바로 내가 앉은자리,

지금 여기에 아름다움이 모든 진리가 오롯이 다 존재하니,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시작해 봅니다!


이제 다시 크게 세 번 심호흡을 하며, 어지러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밖으로 나간 마음을 안으로 불러들여봅니다.



<의상대사, 법성게(法性偈) 중에서 발췌, 번역>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우주의 현상과 본질은 두루 융화되어 두 가지 모습이 없으니, 
 (원인과 조건 따라 나타났다 사라질 뿐) 그 본질은 항상 고요하더라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모든 경계가 끊겼으니, 
 다른 경계가 아님을 깨달은 지혜로만 알 수 있다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미세한 티끌 하나에도 우리를 이루는 DNA, 업보는 물론, 
 대우주의 원리까지도 들어있고, 모든 티끌 속이 또한 이와 같다네. 


무량원겁즉임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셀 수없이 긴 세월도 한 생각(꿈)이요, 
 순간이 곧 한량없는 영겁이라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다른 듯 하나, 한 생각에 뒤섞였고,    
 복잡한 듯 하지만, 혼란 없이 정연하게 따로 나뉘어져 이루었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고통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이요, 
 본질과 현상 또한 분별되지 않는 듯 모호하니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려거든,  
 망상을 쉬지 않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네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마침내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중도의 길에 들어서게 될지니,
예로부터 고요한 평정심을 이룬 자를 ‘깨달은 자’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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