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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Oct 13. 2021

글을 쓰게 된 사연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손길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바쁜 사람 이미지가 강하다


아버지가 바쁜 건 어린 시절의 나에겐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잔소리꾼이 없는 셈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면 

먼저 어머니가 엄청난 잔소리꾼이었고

바쁜 아버지도 주말이나 집에 있을 때면 

듣기 싫은 잔소리로 귀가 따가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갖고 있지만

지금도 오랜 시간 같이 있는 게 힘든 이유는

바로 잔소리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께 받은 것보단 

부모님께 받은 피해만 생각났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과외를 안 시켜줘서 

수학을 못한다던가 


아버지가 화를 잘 내셔서 

나도 화를 잘 낸다던지

...


그런 식으로 내가 부족한 부분을 

부모님 탓하면 맘이 편했다


그렇게 부모님과 관계를 시시한 관계로

도움 보단 피해를 주는 사람들로

생각하다가..


최근에 오래 달리기를 하던 중에 

문득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감사한 것들은 뭐가 있을까?

라는 참신한 발상이 떠올랐는데..


생각의 꼬리를 물고 들어가다 보니 

애석하게도.. 정말 많았다


돈에 관한 것들이 특히 많았고

어쨌든 돈이 없으면 가능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지금 어른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상황이 가능한 것조차

부모님의 배려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등등


약속시간을 엄수하는 습관 등 습관적인 부분들도

부모님의 호통과 교육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등등  

 

심지어 지금 오래 달리기를 하고 있는 습관조차  

아버지를 따라 주말 오전 등산을 따라다니던 운동의 연장선이 아니던가 


그중에서도 가장 감사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인데

바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습관이 

아버지의 배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거다


꽁꽁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숨은 공로가 발견된 거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는 달리 돈을 잘 버는 사람이었다


회사생활을 한 대한민국 사람 중에 

가장 많이 번 사람 중 한 명일지 모르겠다


횡령이나 부수적인 수입 제외하고 

월급만을 놓고 본다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중학생으로 올라갔을 때부터

내 나이 30대 초반 아버지께서 은퇴하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타이틀이 사장이었다


치킨집 사장이 아니라 

대기업 사장이셨다


그러니까 인생 자체가 늘 바쁠 수밖에 없으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1994년 미국에서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여름

외국계 대기업으로 옮기셨다

한국 법인 사장을 맡게 되며 연수 차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온 가족이 미국으로 가면서 좋았던 점도 많았지만

정서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는데

바로 친구들과 헤어짐과 향수였다


그 당시에는 카카오톡이나 스마트폰이 없어서

친구들과 대화를 하기 위한 수단은 

국제전화나 편지 외엔 없었다


국제전화는 참고로 30분 통화하면 

100달러가 나왔고

원화 10만 원 정도인데.. 그 당시에

영화표가 2000원, 초코파이가 100원이던 시절이다

그 당시 10대 초반의 나이를 감안하면 더 큰돈이었다

어쨌든 국제전화로 친구들과 대화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국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한인신문 혹은 편지 외엔 없었다


한인신문은 몇 달에 한번 정도 가는 

시카고 한인 마트에 가야

볼 수 있었고 대부분 시카고에 사는 한인들 이야기였고

여하튼 의지할 만한 수단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서태지가 1집을 대박 내고 

2집 활동까지 하는 상황에서 비행기에 올랐는데

이어질 서태지의 3집의 근황이 너무 궁금했고 

그보다 서태지의 뒤를 이어 

듀스가 1위 탈환을 위해서 어떤

준비를 했는지가 가장 궁금했고


만화 슬램덩크의 이어지는 스토리도 궁금했다


이런 모든 한국을 향한 향수병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시켜준 창구는 

바로 편지였다


나는 살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첨엔 어설펐다

쓰는 법도 몰랐다


편지를 쓰면 1주일에서 10일 정도 거쳐

친구에게 도착하게 되고 

친구가 편지를 써서 보내면 또다시 1주일에서 10일 정도의 시간 뒤에

나에게 도착하는 시스템인데 


내 것이 그쪽에 도착하고 

답장이 나에게 도착하는 

메커니즘이 신선했다


편지를 쓸 때마다 답장이 돌아왔다

이탈률이 별로 없었던 점도 돌아보면 신기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외국 나간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을 때 

카톡이 돌아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짜임새 있는 일련의 팀워크이자 활동이었다


나에게 편지 쓰기는 보석 같은 가치를 지닌 활동이었는데

친구들이 손수 고른 편지지에

손글씨로 적은 편지는 

온전히 나를 향한 애정이

담겨있었기 때문이고


어떤 친구는 창의적 구성으로 

어떤 친구는 기막힌 그림솜씨로 

어떤 친구는 동봉해주는 아이템으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슬램덩크의 명장면을 가위로 오려

보내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도 편지를 쓸 때는

최대한 재밌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핵심 메시지가 자극을 줄 수 있도록

부연설명을 열심히 적었다

여하튼 나날이 발전하는 편지를 제작했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편지를 기다리게 되고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는 팀워크의

감동을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도 공감하고 있었다


스크랩된 연애 뉴스와 친구가 기자가 되어 

전달하는 소식은 

한인신문보다 생생했고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일어나는 소동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고 동봉된 사진은

사진첩에 하나둘씩 쌓여가고 있었다


나 역시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NBA 카드라던지

미국에서 일어나는 이슈들 가령 

마이크 타이슨과 맥닐리의 대결이 대서특필된 

신문을 오려서 보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미국에서 중학교를 보내는 와중에 

편지는 그만큼 소중했고 그때의 열정과 간절함으로

썼던 마음이 관성이 되어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매우 바쁘신 아버지께서
나의 편지를 언제나 한국으로 부쳐주셨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편지만 쓰면 자동으로 한국으로 간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편지지와 국제 규격의 편지봉투를 준비해 놓은 것도 아버지셨고


다 쓴 편지에 우표를 살붙이고

국제 우편을 부쳐주신 것도 아버지셨던 것이다


아버지 스타일 상 우표 또한 특별 에디션으로 

받는 이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해주셨을 것이 확실하다


늘 편지가 내 손을 떠난 지 3주도 채 되기 전에 

답장이 도착했는데, 

그 말은 아버지는 늘 가장 빠른우편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편지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을 고려해서였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미국에 사는 2년의 시간 동안 

친척과 친구를 포함해서 대략 10명 정도의 상대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서로의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과

꾸준히 주고받은 것도 대단하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우편배달부 역할을 

해주셨던 아버지가 계셨기에 가능했던 거다


에세이를 쓰고 있는 지금도.. 

소설을 쓰려고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 

광고회사를 다니며 카피를 쓰는 등 


글과 친해진 나라는 사람은 

아버지의 중간 역할 없이는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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