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사는 이야기
요즘 호놀룰루 예술학교(Honolulu Academy of Arts)에서 몇 주째 데생을 배우고 있다. 어제는 여자 누드를 그리는 시간이었다. 내가 누드를 그리는 것은 처음이며 그것도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리는 것도 처음이다. 강사가 데생에 관한 좋은 책을 소개하고 있는 가운데 여자 모델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 모델은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보였다. 그녀가 들어온 후 강사는 한 10분 정도 누드 데생에 대해서 설명했으며, 그 사이 모델은 옷을 모두 벗고 교실 중앙에서 포즈를 취했다. 교실 안은 파스텔이나 차콜이 스케치북에 마찰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내가 다니는 데생 클래스에는 8명의 여자와 5명의 남자가 있다. 여자 두 명은 60세를 넘은 것 같았고, 한 명은 50대 정도, 그리고 나머지 여자들은 30대나 20대 정도로 보인다. 은퇴한 노인도 있고, 군인, 은행원, 대학생도 있다. 남자들도 두 명은 은퇴한 노인이며, 두 명은 대학생, 그리고 나.
우리가 평소에 과일이나 병, 옷 같은 정물 데생 연습을 하던 때와는 좀 분위기가 달랐다. 모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가 옷을 모두 벗고 교실 중앙에 서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좀 어색한 분위기에서 데생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색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자보다 여자들의 생각이 더 궁금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아무 말 없이 진지하게 누드모델 데생에 집중했다.
나도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모델과 내 눈이 잠깐 마주쳤을 때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에서 눈을 돌려 그리고 있던 그녀의 다리에 집중했고 다시 스케북을 보았다. 2주 후에는 남자 누드모델이 오기로 했는데 더 어색할 것 같다.
(2004. 4.17)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취미로 데생을 배워볼까 해서 수강한 클래스였다. 강사는 조그만 키의 남자인데 프랑스에서 미술공부를 한 사람이다. 성이 리인데 한국계인지 중국계인지 잘 모르겠다. 굳이 한국계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부분 과일이나 꽃병 등의 정물이나 손, 꽃 등을 데생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지막 두 번의 클래스에서는 누드를 데생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실제 모델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난생처음 누드모델을 가까이에 두고 데생을 해본 것이다. 정물을 데생할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데생에 집중도가 높아지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모델의 눈길이 신경 쓰였다. 두 번째는 남자 누드 데생인데 여자 모델보다 분위기가 더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 데생 수업이었다.
어렸을 때는 만화를 따라서 그려보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그림을 전혀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하와이에 와서 가끔씩 시간 날 때 스케치를 해보기도 했지만 어디서 정식으로 기초를 배운 것이 아니라 별로 늘지를 않았다. 그림은 볼 때는 쉬운데 그리려면 어려웠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수히 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데는 엄청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면 글을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은 유사한 점이 많다. 쓰고 그리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읽고 보는 입장에서는 별로 그렇지가 않다. 작품을 아주 세밀하게 뜯어볼 때야 비로소 노력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창작자의 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03.1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