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동일한 사건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들이 그 기원으로 삼고 있는 신화부터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문서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조차 그 사실을 기록한 사람의 관점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흔히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역사 스스로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는 후대의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뿐이다.
폴 보이어 (Paul S. Boyer) 교수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to American History> (한글 번역: 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라는 책은 제목 그대로 역사책으로는 아주 짧다. 하지만 그 내용은 꽤나 알찬 편이다. 저자는 역사책을 쓰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과장된 우월감이나 지나친 비판을 피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저자가 미리 밝힌 것처럼 저자 자신도 미국이라는 사회의 산물이며 미국인이라는 한계는 존재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보면 저자가 러시아나 중국사람이었더도 한계가 존재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가 서술한 짧은 미국 역사의 요점을 정리해본다.
1. 선사시대-1763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이주
피렌체의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된 이 신대륙은 엄밀히 말하자면 신대륙이 아니다. 신대륙이라고 불리기 1만 5천 년 전부터 이곳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배를 타거나 걸어서 알래스카로 왔다. 그 시절에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점차 퍼져나가며 서로 상이한 집단들이 생겨났다. 서기 1500년에는 북 아메리카의 인구가 1,00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아메리카와 남 아메리카에도 수백만 명이 살며 마야, 아스테카, 잉카문명이 번성했다.
15세기 말, 유럽은 아시아로 가는 빠른 무역로를 모색했다. 포르투갈 인들은 아프리카 끝을 돌아 아시아로 향했다. 이탈리아인 콜럼버스는 스페인 군주를 설득해 자금을 지원받고 대서양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두 달의 항해 끝에 쿠바 앞바다에 도착한 이들은 이곳이 인도라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이후 카리브해,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남 아메리카, 플로리다, 뉴멕시코에는 스페인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군인, 모험가, 관리, 가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뒤를 이은 네덜란드는 허드슨강을 타고 올라가 (네덜란드에 고용된 영국 항해가 헨리 허드슨의 이름을 따 강 이름이 됐다) 맨해튼 지역을 레너피족에게서 구입해 뉴 암스텔 담을 건설했다. 그때가 1625년이었다.
뒤늦게 영국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임을 기려 버지니아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1611년부터 버지니아에서 담배를 경작해 유럽으로 수출했다. 영국은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로 식민지를 확산하면서 플로리다를 차지한 프랑스와 맞닥뜨렸다. 남쪽에는 영국 국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 퀘이커교, 감리교, 침례교도가 많았고, 매사추세츠에는 비 국교회인 필그림이 1620년 플리머스라는 정착지를 세웠다. 이들이 1621년 왐파노아그족과 함께 연 잔치가 추수감사절로 발전했다. 이 지역의 첫 번째 총독 윌리엄 브래드포드 (William Bradford)가 1630-1651년 사이의 정착 역사를 <플리머스 농장에 대하여>(Of Plymouth Plantation)로 펴냈다.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매사추세츠 식민지는 1630년 보스턴에 세워졌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에 남아있던 가톨릭의 관행을 정화하려 해 청교도(Puritan) 라 불렸다. 뉴잉글랜드의 이주민들은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햄프셔, 버몬트, 메인까지 확산됐다. 이들은 목재, 곡물, 군수품, 대구를 영국과 서인도 제도의 영국 식민지에 보내고 차, 가구, 식기, 제조품 등을 영국에서, 설탕, 당밀 (럼주의 재료)을 서인도제도에서 들여왔다. 영국은 펜실베이니아, 뉴욕, 스웨덴의 모피 무역 기지인 댈라 웨어, 뉴저지 등 중부 대서양 연안에도 식민지를 건설했다. 1664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충돌 네덜란드의 뉴 암스테르담 총독이 영국군에 항복하며 뉴 암스테르담이 뉴욕으로 변경됐다. 영국의 제임스 2세가 될 요크 공작의 이름을 딴 것이다. 허드슨 벨리의 비옥한 농업지대를 배후에 둔 이곳은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 이주민들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계는 때로는 관계가 좋은 적도 없진 않지만 대체로 착취적이고 폭력적인 충돌을 피하기 어려웠고 그 피해는 대부분 원주민들이 보았다. 그 결과 아메리카 식민지화가 시작되기 이전 북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220만 명에서 1800년경에는 60만 명으로 감소했다. 노예제도는 고대 문명부터 있었고 아프리카와 아랍에서 번성했다. 그 제도가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로 들어왔다. 첫 노예선은 1619년 제임스타운에 도착했다. 노예제도는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의 식민지로 확산됐다. 1790년 북 아메리카의 노예수는 70만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등 남부의 담배와 쌀을 생산하는 지역에 분포했다. 영국은 1651년부터 1733년까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의 경제를 통합하려 했다. 식민지는 원재료를 공급하고 제조품과 소비재를 수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과의 이해관계보다는 자신들의 관계가 더 중요했고, 이미 높은 수준의 자치와 사실상의 독립을 경험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에서의 사회적 신분계급은 유럽보다는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지 사회에도 성작자, 변호사, 대상인, 버지니아 대농장주, 뉴욕 지주, 필라델피아 퀘이커 기득권층, 뉴잉글랜드 선장 등이 엘리트층이 있었다. 중간계급으로 자작농, 장인이 있었고, 하층민으로 일용직 노동자, 농장 노동자, 계약 노동자 등이 있었다. 투표와 공직은 재산을 소유한 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1636년 하버드 칼리지를 시작으로 1769년 다트머스 칼리지까지 아홉 개의 칼리지가 문을 열었다.
프랑스는 1608년 퀘벡을 건설하고 모피 무역업자들이 미시간주, 위스콘신주, 미네소타주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내려가 요새, 선교지, 무역기지를 건설했다. 1756년부터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7년 전쟁을 벌이자 식민지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오하이오 밸리, 오대호, 뉴욕 북부, 세인트 로랜스 강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충돌했다. 식민지에서의 영국-프랑스 전투는 끝났지만 식민지인들은 영국에 대한 불만은 커져갔다. 영국이 파리조약에 따라 이주민의 서부 진출을 제한하고 애팔래치아와 미시시피 사이의 땅을 인디언에게 남겨둔 일, 새로 획득한 영토에 살던 프랑스 가톨릭교도의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점,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채무를 식민지의 세금으로 갚으려 했던 점이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심기를 거슬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