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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Sep 04. 2022

짧지만 알찬 미국 역사 2

2. 1763-1789년: 독립전쟁과 헌법 제정


영국은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식민지에 수입되는 수많은 품목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다. 또한 인지세법을 만들어 신문, 자격증, 법률문서를 제작하려면 세금을 내도록 했다. 식민지에 거주하는 영국군이 숙식을 요청하면 무조건 제공하도록 했다. 영국은 이주민이 군사적 보호와 상거래 특혜를 받지만 영국 본토보다 낮은 세금을 내고 있다고 정당화했다. 식민지인들은 영국 의회에 대표가 없는 한 어떤 과세도 권리침해라고 주장했다. 보스턴의 새무얼 아담스는 세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식민지 전역에 유포해 영국 의회의 행위를 비난했다. 1768년 보스턴의 군중이 상인 존 헨콕 소유의 선박을 몰수한 세관원들을 공격했다. 1770년 영국 의회는 타운샌드 관세 대부분을 폐기했으나 차에 대한 세금만은 유지시키고 보스턴에 4천 명의 영국군을 배치했다. 1773년 12월 인디언으로 위장한 50여 명이 영국 선박에 올라 차상자 342개를 항구에 던져버렸다.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이다. 영국 의회는 강압 법을 통과시켜 항구를 폐쇄하고 보스턴을 직접 지배했다.


1774년 9월, 조지아를 제외한 13개 식민지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이들은 영국 수입품 불매운동을 승인하고 군사적 준비를 재가했다. 식민지의 정치인,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영국의 조치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1775년 2월 영국 의회가 매사추세츠가 반란 상태라고 선언했다. 4월 700여 명의 영국군이 무기은닉처를 장악하기 위해 콩코드로 행군했다. 무장 이주민들이 영국군의 경유지인 렉싱턴에서 싸우다가 8명이 죽었다. 영국군은 보스턴으로 돌아오다가 화난 이주민들과 다시 맞닥뜨렸다. 사상자는 영국군 270명, 이주민 100명 정도였다. 6월에는 벙커힐과 브리스 힐에서 이주민과의 충돌로 영국군 사상자 1,000명, 이주민 사상자는 300명이 발생했다. 1776년 봄 대륙회의에서 버지니아 농장주이자 정치 지도자 토마스 제퍼슨 등을 주요 저자로 독립선언문 초안이 작성됐다. 필리델피아 정치인 밴저민 프랭클린이 파리에 특사로 파견돼 프랑스 차관을 확보하고 군사적 지원을 얻어냈다. 그러나 캐나다, 카리브해 식민지는 동참하지 않았다. 대륙의 13개 식민지에서도 백인의 20%에 이르는 왕당파는 경제적, 직업적, 개인적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뉴욕을 점령하고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부를 공략했다.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은 대륙 군은 버지니아의 영국군을 공격하고, 바다 쪽에서는 프랑스 함대가 영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전쟁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 군의 승리로 끝났다. 1783년 파리조약 체결로 마침내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1787년 로드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주의 대표가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작성된 헌법 초안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사이의 권력을 나누고 입법, 사법, 행정부가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농 세력은 개인이나 주의 권리가 보호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연방주의 지지자들은 권리장전을 마련해 명확하게 연방정부에 부여되지 않은 권력은 각 주와 주민이 보유하도록 했다. 첫 번째 연방선거에서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 두 곳을 꼽으라면 보스턴과 필라델피아다. 보스턴은 1630년 청교도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초기에는 세 개의 산이 있어 트리 마운틴이라 불렸으나 유력한 이민자들이 잉글랜드 링컨셔 카운티 보스턴에서 온 이유로 보스턴이라고 불리게 됐다. 보스턴이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독립전쟁을 유발한 보스턴 차 사건, 콩코드 전투, 벙커힐 전투가 이곳에서 일어난 것을 꼽을 수 있다. 현대의 보스턴은 뉴잉글랜드의 경제, 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보스턴시 자체는 작지만 인근의 케임브리지, 워터타운, 뉴튼, 브루클라인 등 작은 도시들과 합쳐 광역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보스턴은 특히 교육, 금융, 의료, 연구, 문화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필라델피아는 1682년 영국 출신 퀘이커교도 윌리엄 펜이 잉글랜드 찰스 2세로부터 종교적 자유를 승인받고 정착한 곳으로 1790년부터 10년간 미국 연방의 수도였다. 미국 헌법의 기초가 여기서 이루어졌다. 필라델피아는 독립을 위한 대륙회의와 독립선언문이 기초되는 등 미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보통신, 상업, 금융, 출판이 발달했다. 필라델피아 인구는 유럽계와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반반 정도로 구성되고 있는데, 1600년대 남부의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퀘이커교도의 인종 동등 개념에 따라 대거 이동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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