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789-1850년: 새로운 비전, 새로운 위험
헌법은 정당을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워싱턴은 정당을 정치인들이 조작한 파벌로 규정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재무장관 해밀턴과 국무장관 제퍼슨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이념을 대표하는 중심이 되고 있었다. 해밀턴은 전시에 발행된 화폐를 정부가 액면가로 되사 주고, 연방정부가 각 주의 채무를 갚아줄 것을 제안했다. 북부 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해밀턴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대신 수도는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가 양도한 땅인 남부(현재의 워싱턴 D.C.)에 두기로 했다.
연방정부의 증류주 과세에 반발해 1794년 발생한 위스키 반란 때 해밀턴은 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으며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첫 번째 정당, 연방당 (Federalists)을 만들었다. 연방당은 북부의 채권자, 상인, 사업가, 부유 지주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소농과 도시 노동자, 각 주의 권익을 중시하는 무리는 제퍼슨을 중심으로 민주공화당 (Democratic Republican Party)를 만들었다. 1796년 연방당의 애덤스가 대통령에 선출됐고, 민주공화당의 제퍼슨이 부통령에 선출됐다. 1800년에는 제퍼슨이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평화로운 정권교체의 선례를 남겼다.
제퍼슨은 1803년 전쟁으로 돈이 궁해진 나폴레옹으로부터 1,500만 달러에 루이지애나를 매입했다. 당시 루이지애나는 동으로 미시시피강으로부터 서로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었다. 1812년 영국이 계속 미국의 해운업을 방해하지 제퍼슨의 후임 매디슨은 캐나다와 이리호를 공격하는 등 전쟁을 일으켰다. 1814년 벨기에 켄트에서 종전 합의가 됐으나 뉴올리언스를 공격하던 영국군은 이 소식을 듣지 못했고, 1815년 앤드류 잭슨이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뉴올리언스 전투의 승리는 미국인의 자부심을 폭발시켰고 매디슨은 재선에 성공했다.
1823년 영국은 쿠바에 간섭하는 프랑스에 미국과 함께 경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존 Q. 애담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먼로주의를 발표하며 세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자신감을 나타냈다. 1828년 지금까지의 정치적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잭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자수성가한 그는 서부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정신을 구현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잭슨의 승리는 재산이 있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던 제약이 폐지되면서 남부의 면화 농장주, 서부의 자영농, 동부의 육체노동자와 공장 노동자들이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던 시대의 반영이었다. 1832년 잭슨 지지자들은 민주당 (Democratic Party)을 탄생시켰다.
1850년 미국 백인 인구는 이민자와 높은 출산율로 2,100만 명에 이르렀다. 60년 전 보다 5배가 증가한 것이었다. 많은 이민자가 서부로 갔고, 해안가 도시에서는 육체노동자, 공장 노동자가 거주하게 되었다. 1819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획득했고, 1846년에는 영국과의 협약으로 워싱턴주, 오리건주, 아이다호주를 획득했다. 1836년에는 스페인령 멕시코의 일부였던 텍사스에서 영국계 미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멕시코군이 이들을 습격했으나 샘 휴스턴이 지휘하는 의용군이 멕시코에 승리하며 텍사스는 독립하게 되었다. 1845년에는 미국의 주로 편입되었다.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멕시코시티를 점령당한 멕시코가 항복하면서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주를 포함한 130만 제곱 킬로가 미국 영토가 됐다. 1848년 골드러시로 인구가 증가한 캘리포니아는 1850년 미국의 한 주가 되었고, 이주민들이 서부로 가면서 많은 주들이 미국의 주로 편입됐다.
이주민들의 서부 진출과 함께 고속도로, 운하, 철도가 건설됐다. 1825년 미국의 첫 주간 고속도로 내셔널 로드가 메릴랜드에서 시작돼 1839년 일리노이까지 닿았다. 1825년 이리운하가 건설돼 허드슨강과 이리호가 연결됐다. 1828년 볼티모어에서 오하이오까지 연결하는 철도가 착공되었고 1850년까지 총연장 1만 4,500 킬로미터의 철도가 건설됐다. 인구증가, 영토확장, 기반시설 확대로 경제발전이 시작됐다. 1850년대 남부의 면화와 담배, 북부의 곡물과 축산이 중심이었던 경제는 1880년대에 들어 기계화된 공장이 북부 전역에 들어서며 직물, 신발, 시계, 총, 기계, 기차 등의 공산품이 생산되며 산업화의 기반이 다져졌다. 그러나 서부로의 팽창은 인디언들에게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인디애나의 인디언 연합 테쿰세 동맹, 미시시피 동쪽 땅을 되찾기 위해 일어난 블랙호크의 소크족, 1830년 인디언 지주법으로 밀려난 남부의 체로키족 등은 설 땅을 잃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작품으로는 지나간 식민지 시대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Washington Irving의 <Rib Van Winlke>, 농장과 도시가 늘어나는 가운데 우드맨의 운명을 다룬 James F. Cooper의 <The last of the Mohicans>(1826), 낭만주의의 어두움을 표현한 Edgar. A. Poe의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1839), <The Man of the Crowd> (1840)와 뉴욕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파리 배경으로 각색한 <The Mystery of Marie Roget>(1842), 죄악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뉴잉글랜드 조상을 묘사한 Nathanial Hawthorne의 <The Scalet letter>(1850)와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1842), 고래를 향한 선장의 강박을 다룬 Herman Melville의 <Moby Dick>(1851), Walt Whitman의 시집 <Leaves of Grass>(1855), 정의롭지 못한 법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 Henry Thoreau의 <Civil Disobedience>(1849)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2년간 지낸 경험을 기록한 <Walden> (1854) 등이 있다.
미국의 영토
미국이 현재의 영토를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1770년대 독립전쟁 때만 해도 동부의 13개 주에 불과했었다. 1800년대 초에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사들였고, 유럽에서의 이민이 늘어나면서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서부로 진출했다. 1800년대 중반 플로리다를 스페인으로부터, 아이다호, 오리건, 워싱턴을 영국으로부터 획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서부 쪽으로만 확장되고 있었다. 그런데 텍사스가 멕시코로부터 독립하며 미국에 편입됐고, 그 일로 멕시코와 전쟁이 발생하며 캘리포니아,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 뉴멕시코, 콜로라도를 멕시코로부터 획득했다. 이렇게 미국의 현재 영토는 1800년대 중반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멕시코로부터 거대한 땅을 획득할 당시 미국 내에서도 반대가 적지는 않았으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고 보면 그런 반대가 전혀 없었더라면 지금의 멕시코 전체가 미국 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1867년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였다. 알래스카 땅 크기만 170만 제곱킬로미터로 인구수는 적지만 면적은 미국에서 독보적으로 크다. 두 번째로 큰 텍사스의 두 배가 넘는다. 어쨌든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100년도 안돼 태평양과 대서양을 접한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되었고 그 땅에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며 발전의 기틀을 다져놓은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크기를 비교하자면, 미국은 980만 제곱킬로미터에 3억 2천8백만 명이 살고 있고, 유럽(EU)은 42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에 4억 4천7백만 명이 살고 있다.
재미 삼아 구글 지도로 살펴보니, 뉴욕시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장 빠른 길로 쉬지 않고 운전해서 가면 43시간이 걸린다. 북동부 맨 위에 있는 메인주의 바 하버에서 서부의 가장 아래인 캘리포니아의 샌디에이고 까지는 50시간이 걸린다. 북서부의 시애틀에서 남동부의 마이애미까지는 48시간이 걸린다. 동부를 종단하는 메인주의 포틀랜드에서 마이애미까지는 25시간이 걸리고, 서부를 종단하는 시애틀에서 샌디에이고까지는 20시간이 걸린다. 언젠가는 이런 길을 따라 자동차 여행을 해봐야겠다. 그냥 무작정 인터 스테이트 도로를 달리는 시간이 이 정도로 걸리니 마을도 들르고, 유적지도 가고, 잠도 자고, 식사도 하면서 천천히 가면 한 노선에 최소한 2주 이상은 잡아야 할 것 같다. 그런 여행을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