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사는 이야기 2
2002. 날짜 미상
하와이에서 가장 큰 샤핑센터인 알라모아나 샤핑몰 앞에는 조그만 라면가게가 하나 있다. 이 라면가게는 한인이 경영하는 일본식 생라면 가게로, 고객은 샤핑센터를 찾는 일본 관광객이나 로컬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라면가게가 일본계 주민이 운영하는 다른 라면가게들과 좀 다른 점은 손님들이 라면을 다 먹고도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면보다 더 맛있는 무언가가 남았길래 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빈 그룻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것일까.
‘다이요 누들’이라는 간판이 적힌 이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게 한쪽 구석 벽에 조그만 텔레비전 수상기가 하나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텔레비전은 대부분 켜져 있고, 채널은 영업시간 내내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는 한인방송에 고정되어 있다. 계산대 근처에 있는 주인이나, 홀에서 서빙을 하는 웨이트리스는 한국 드라마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텔레비전을 주시하고 있다. 사정은 손님들도 다르지 않다. 한 젓가락 한 젓가락 라면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눈길과 신경은 한국 드라마에 빠져있다. 어떤 이들은 드라마 시간에 라면 먹는 속도를 맞추려는 듯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라면을 먹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라면을 다 먹은 후에 본격적으로 드라마를 보려는지 서두는 모습이다. 라면가게 주인은 그래도 이들이 “얼른 나가주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다. 자리를 좀 차지하고 있어도, 이들이 자신처럼 한국 드라마의 매력에 쏙 빠진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하와이에서 여행사를 경영하는 한 한인도 얼마 전 하와이 로컬 주민들이 한국 드라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경험을 했다.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서 로컬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그룹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이 드라마에서만 보던 한국 각 지역을 직접 가보고 싶고,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방송국도 직접 방문해보고 싶다며 한국 단체여행을 하기 위해 여행사에 문의를 해온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기도 하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소를 꼭 가봐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것이었다. 가보고 싶은 장소도 회원들과 토론을 해서 스스로 골랐으니 항공편과 호텔, 그리고 한국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묶어서 한국 단체관광을 할 수 있도록 맞춤 관광상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하와이 주민들의 개별적인 한국 여행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처럼 단체 방문은, 그것도 드라마에서 나온 장소를 가보고 싶어서 수십 여명이 단체로 한국을 방문하려는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한국 드라마 팬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한국 드라마를 함께 즐기는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어느 드라마의 한 특정 장면을 골라 그 장소가 실제로 촬영된 지명을 맞추는 퀴즈를 내고 선물을 준다든지, 한국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는다든지 한국문화 체험을 통해 한국문화에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단체여행 문의를 받은 한인 여행사 사장은 로컬 회사들과 업무협의를 하는 중에 한번 더 놀랐다. 항공사 직원도 그렇고, 공항 직원도 그렇고 자신이 한국 사람인 걸 알자마자 일을 제쳐놓고 먼저 물어보는 것은 “요즘 방송되는 한국 드라마를 보느냐”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 스토리를 줄줄 늘어놓는 것 아닌가. 그 여행사 사장은 사실 드라마에 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드라마를 시청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로컬 주민들이 한국 드라마에 얼마나 빠져있는지 가늠해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로컬 주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지만 이들 로컬 주민들과의 접촉을 많이 한 다양한 계층의 한인들을 만나볼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가 한국 드라마에 대해서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해서 진땀을 뺐다는 사람에서부터, 한국 드라마를 본 후 서브타이틀(자막)이 있긴 하지만 드라마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한국말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람, 어디 가면 제대로 된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고 알려달라는 사람들까지 한국 드라마에 빠진 하와이 주민들의 한국에 대한 애착은 끝이 없다.
이러한 한류 붐을 반영하듯 하와이의 양대 신문인 ‘호놀룰루 애드버 타이저’와 ‘호놀룰루 스타 불레튼’도 한국 문화에 대한 특집기사를 심심찮게 다루고 있다. 최근 호놀룰루 스타불레튼은 “사랑에 중독되다”라는 제목으로 하와이 주민들의 한국 드라마에 대한 애착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 기사는 “한국 드라마의 열기가 중국과 일본, 대만,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에서 수백만명의 팬들을 확보한 가운데 더욱 확산되고 있다”라고 전하고 “이러한 열기는 단지 아시아 국가뿐만이 아니라 시카고, 필라델피아,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워싱턴 D.C., 뉴욕 등 미국을 휩쓸고 있으며, 물론 하와이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소개했다.
호놀룰루 애드버 타이는 또한 “한국 드라마가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액션과 섹스가 난무하는 미국 드라마와는 달리 한국 드라마는 가족의 화목을 강조하거나 선남선녀의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어서 부담이 없고 신선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까지 내놓기도 했다.
물론 한국 드라마의 매력에 쏙 빠져있는 하와이 주민들은 아직도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하와이 인구의 5%도 채 안 되는 한인들의 문화가 다른 민족들에게 크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은 해외에 사는 한인으로서는 어깨가 으쓱해지는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얼마 전 할리웃 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하와이 개봉관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은 한국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도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 드라마에 대한 열풍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국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늘어 한국 음식점들에 로컬인들로 붐비고, 한국 화장품이 로컬 여성들에게 잘 팔리고, 한국 여행을 준비하는 하와이 주민들이 늘고 있는 것 등의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로 “한국 드라마에서 촉발된 한류 열풍”이라는 한마디로 귀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현상에 만족하고만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비슷비슷한 배우들이 기존에 히트한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스토리로 계속 반복만 한다면 한류에 중독된 로컬 주민들의 사랑도 오래간다고 장담할 수 없다. 문화 콘텐츠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문화를 상품과 연계시켜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문화가 깊숙이 배어있는 하와이의 문화가 서서히 바뀌어 로컬 신문이 “사랑에 중독되다”라는 한국문화에 대한 기사를 다루어도 ‘신기한 듯’이 아니라 ‘당연한 듯’ 읽을 수 있어야 하는 수준, 일본 주인이 경영하는 일본 라면가게에서도 한국 드라마를 틀어놓지 않으면 장사가 잘 안 되는 정도까지 바란다면 너무 욕심이 큰 것일까.
2021.02.01
드라마로 촉발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요즘도 여전한 듯 보인다. 몇 년 전부터는 BTS 가 세계적으로 뜨면서 라디오에서도 심심찮게 한국 노래를 들을 수도 있다. 넷플릭스에서는 한국 영화와 미니시리즈도 흔히 볼 수 있다. 가끔 미니시리즈를 보면 재미있는 것들도 꽤 있다. 오래전 한국에 살 때 한국영화를 볼 때 재미를 느끼지 못해 끝까지 보지 못하고 상영 도중 일어나 나오던 일을 생각하면 한국의 영상 제작자들의 수준이 많이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유튜브로는 가끔 한국 뉴스나 다큐멘터리 등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매일 9시 뉴스를 보는 것처럼 듯 한국 뉴스에 너무 집착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이민자의 입장에서는 한국 뉴스가 미국 생활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뉴스는 미국 뉴스와 로컬 뉴스인 것이다. 미국에 오래 살면서도 너무 한국 뉴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닌 듯하다. 이민자로서 미국에 발붙이고 살려면 영어를 더 공부해야 하고, 미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해야 하는 일이 한국 뉴스에 대한 집착보다 더 시급한 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