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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Jan 30. 2021

마우이 이민 선조의 흔적

하와이 사는 이야기

마우이 Haleakala 2007


만약 마우이 사탕수수 농장이 없었다면 
한인 이민 역사도 없었을 것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섬과 하와이에서 가장 큰 섬인 빅 아일랜드의 중간에 자리 잡은 마우이. 두 개의 화산이 연결되어 옆에서 보면 마치 여체의 상반신 모양을 닮은 마우이. 예로부터 마우이는 고래잡이와 파인애플, 사탕수수로 유명했던 곳이다. 
알래스카에서 시원한 여름을 보낸 고래들이 겨울철에는 마우이에 몰려들고, 그 고래를 잡기 위해 한때는 세계 곳곳에서 포경선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고래기름보다는 석유가 인기를 끌면서 포경업이 한물가고,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농업이 번성했다. 하와이의 여러 섬들 중에서도 유난히 일조량이 많은 점이 파인애플과 사탕수수 등 대규모 농사를 가능케 했던 것. 
옛날, 마우이의 한 마을에 살던 어린이가 빨래가 빨리 마르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불평을 듣고 하늘로 올라가 태양을 그물로 끌고 왔기 때문에 일조량이 많아졌다는 전설, 그리고 그런 전설이 나옴직 한 뜨거운 마우이. 그 뜨거운 햇살이 한인 이민의 발단이라고 말한다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햇볕-농장-일꾼-이민 이란 순서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뜨거운 햇살이 있었기에 사탕수수와 파인애플을 재배하는 대형 농장이 생겨났고, 바로 그 농장에서 일할 일꾼이 필요해 한인 이민이 시작됐다. 

초기 한인들의 미국 이민사는 1903년 1월 13일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년이 조금 못 되는 1905년 11월로 그 첫 이민 물결은 일단 중단됐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신뢰가 가는 것은 일본 정부의 반대다. 당시 조선을 합병하려는 일본 정부가 재미 일본인들의 입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한인 이민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3년간 하와이로 들어온 한인 이민자들은 약 7,500명. 그들은 하와이의 각 섬으로 흩어져 농장으로 갔다. 그중에서 마우이에 정착한 한인 이민의 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상당수의 한인들이 마우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한인 미국 이민의 시작이었던 것만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100년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켓에서 설탕을 살 때 잘 살펴보면 C & S라는 상표를 볼 수가 있다. 그 설탕이 생산되는 곳이 바로 마우이의 하와이 커머셜 앤드 슈거 (Hawaiian Commercial & Sugar Company)다. 그리고 지금 하와이에서 실제 가동되고 있는 사탕수수 농장은 바로 이곳뿐이다. 올해로 13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회사에서 26년째 일하고 있는 한인 조평등씨. 그의 안내로 사탕수수 공장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사탕수수밭에서 막 수확해온 사탕수수를 기계에 넣는 과정 하며, 수십 단계의 씻고, 빻고, 달구는 과정을 거친 후 정제되어 나오는 설탕. 이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한인 이민이 시작된 것이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하루 12시간씩 일했던 당시의 한인 노동자들. 이 회사의 사탕수수밭에는 수많은 한인 초기 이민자들의 애환이 서려있을 있을 것이다. 


100년 전 사탕수수 농장을 관리한 백인들의 집에서 사는
사탕수수 박물관장 부부

하와이 커머셜 앤드 슈거 입구에는 사탕수수 박물관이 있다. 정식 명칭으로는 Alexander & Baldwin Sugar Museum. 박물관장은 일본계 미국인 게이로드 쿠보다 씨, 그 부인은 초대 마우이 한인회장 최영실(54)씨다. 
130년의 사탕수수 역사를 간직한 이 박물관은 농장을 만들기 위해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공사 사진에서부터 그 옛날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도구, 그들이 살았던 모습까지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았다. 작지만 꽤 정성스레 꾸며놓은 공간이다. 
특별히 한인 노동자들과 관련된 것은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캠프 지도에서 한인 교회가 눈길을 끈다. 설명에 의하면 이것이 한인 최초의 교회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교회가 위치한 곳이 일본인 캠프에 가까워 “한인 캠프는 없었냐”라고 박물관장에 물었다. 한인 노동자의 수가 캠프를 이룰 만큼 많지 않아 다른 나라 캠프에 섞여 살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박물관 바로 옆집은 이들 부부가 사는 집이다. 한인, 일본인, 중국인 등의 노동자를 관리했던 백인, 그들이 사용했던 집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초대 마우이 한인회장을 하기도 했던 최 씨는 69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빅아일랜드 힐로에 왔다가 호놀룰루를 거쳐 84년부터 마우이에 눌러앉게 된 케이스. 영어 교수가 꿈이었다는 최 씨는 양태조 씨 등 몇 명과 함께 초기 이민 2세들의 모임을 이어받아 정식으로 마우이 한인회를 발족시켰다. 현재는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퍼시픽대학교(HPU)에서 일본어를 20년째 가르치고 있다. 주 4일 비행기를 타고 호놀룰루를 출퇴근하는 바쁜 생활 중에도 중요한 한인행사에 빠지지 않는 후기 이민 1세대다.

“한국 방문 시 벅찬 감동”
초기 이민자 2세 보마니 김 씨

세월 탓인가, 지역 탓인가. 초기 마우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한인 노동자들의 흔적이 너무도 없다. 현재 마우이에 남아있는 초기 이민자의 2세는 단 두 명. 그중 한 분인 보마니 김 씨(77)를 만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김봉실(나중에 이름을 ‘채봉’으로 바꾸었다)이고, 어머니는 김복순입니다”. “아버지가 하와이에 온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항상 한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는 김 씨. 자신은 원래 몰로카이에서 태어났으나 마우이로 이사와 마우이 커뮤니티 칼리지와 하와이대학교를 졸업하고, 스탠퍼드에서도 공부한 건축 엔지니어다. 

마우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23년간 건축학을 가르치고, 40년 이상 건축계에서 일하면서 하와이의 가장 큰 샤핑센터인 알라모아나샤핑센터를 비롯해 굵직굵직한 공사에 참여했고, 지금도 큰아들 스털링 김 씨와 함께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평생 두 번 한국을 방문했다는 김 씨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라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뿌리’와 관련된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왜 한국관은 없나요?”
마우이 시립공원 이아오 밸리 

관광객이 마우이에 오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은 할레아칼라 화산 국립공원과 이아오밸리다. 시립공원인 이아오밸리에는 초기 사탕수수 노동자를 기념하기 위해 출신국별로 상징물을 세워놓았다. 하와이를 비롯해 중국, 일본, 필리핀, 포르투갈까지 각 나라의 조형물은 있는데 한국 상징 조형물이 없다. 한국 관광객이 오면 “왜 한국은 빠졌냐?” 고 묻는다. 
그래서 이아오 벨리의 한국관 건설은 마우이 한인들의 숙원사업이었다. 다행히 최근 시정부가 부지를 제공하고, 하와이 한인들을 중심으로 한국관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한국관건립을 위한 준비작업이 진행 중이다.
추진위 핵심 멤버인 고영수 씨의 말이다. “늦어도 2003년 1월까지는 이 자리에 한국관이 들어설 겁니다” “입구에 해태상과 장승을 세우고, 안쪽에 단청을 곱게 입힌 팔각정을 세우면 아아오벨리의 여러 나라 상징물 가운데서도 단연 눈에 띌 것입니다”. 고씨는 “총공사비로 약 40만 달러가 들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해태상이 이미 마우이에 도착되어 있으며, 공사가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공사비가 문제다. 

한인 이민 선조 묘역

마우이 카훌루이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인 이민 선조들의 묘지가 있다.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이라 묘지 자리는 좋으나 관리가 허술하다. 약 20 여기의 묘가 흩어져 있는 이곳은 1940년대 후반에 사망한 한인들로부터 최근에 조성된 묘까지 50년의 세월이 공존하고 있다.
“셩수학 1947년 사망”, “리션준 1947년 사망”이라는 묘비는 시멘트 비석에 손가락 또는 나뭇가지를 꺾어 이름을 새겨놓은 듯한 이민 1세대의 묘이고, 대리석으로 사진까지 넣어서 단장한 묘비는 아주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선대에 이어 이 묘지는 한인 2세 노먼 함 씨가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우이 한인들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이 묘에 묻히는지’에 대해서는 갸우뚱한다. 고국을 떠나 타향에서 스산한 삶을 살다 간 이들, 그들이 없었으며 우리도 지금 하와이 땅에 없었을 텐데 이들의 묘지가 너무 허술하다. 셩수학씨와 리션준씨의 자손들은 이곳을 알고 있을까.

마우이에는 한인이 얼마나?

마우이에 한인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최소 500명 이상이라고 말하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2000년 인구센서스에 나타난 바로는 700명 정도이고, 현지 한인들은 500~ 600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가 한인인 순수 한인 가정은 35세대 남짓”이라고 마우이에 15년째 살고 있는 루시아 최 씨가 귀띔해준다. 나머지는 외국인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 그리고 유동인구라는 얘기다. 

그 한인들은 과연 마우이에서 뭘 하고 살아갈까? 옛날 고래잡이 번성했던 항구인 라하이나 와프 샤핑센터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선물점을 운영하는 한인이 30여 명으로 가장 많고, 로컬 관광회사 가이드로 일하는 한인이 10여 명, 한국 술집 10여 곳, 그리고 한국식당도 8곳이 있다. 그밖에 한국식품점, 노래방, 비디오점, 한국 서점, 한국 여행사, 미용실 등이 한 두 곳. 대부분 마우이의 센트럴 지역에 몰려있다. 


(2002.08.31)




하와이에 오래 살아도 빅아일랜드, 마우이, 카우아이 등 이웃섬에 가는 일은 흔치 않다. 다리나 배로 연결되어 있다면 자주 갔을 텐데 오직 비행기로만 갈 수밖에 없으니 그런 것 같다. 호놀룰루 공항에서 40분 정도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다. 게다가 이웃섬에 가면 대중교통이 불편하니 랜트카를 해야 한다. 마우이에 당일 치기로 찾았던 이날은 하루에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벌써 18년이 넘게 지났으니 2002년 당시의 상황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아오밸리에는 예정대로 한국관이 들어섰다. 그리 큰 것이 아니라 정자가 하나 들어선 것이다. 각 나라의 이민 상징물이니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사탕수수 농장은 아직도 운영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도 많이 변했겠다. 

한국이나 하와이나 절대적인 시간은 같을 테지만 상대적인 시간은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하와이에서는 한국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다. 젊음이 언제고 지속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세월의 속도는 빠르다.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다.       


(0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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