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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 Bird Jan 29. 2021

Do you need ‘플라스틱’?

하와이 사는 이야기

자주 가던 팔라 룩아웃


비 내리는 금요일 저녁 무렵, 회사 동료 둘과 함께 한 일식집에 들렀다. 전부터 한잔 하자고 건성으로 했던 말이 씨가 되었고, 금요일 오후에 마침 비까지 추적추적 오는 걸 보니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우리가 찾은 집은 와이키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정식으로 식사를 하기보다는 퇴근길에 가볍게 들러서 한잔 하기 좋은 일본식 선술집 같은 곳이었다.  


문 앞에 높여있는 흰색의 조그만 통에 우산을 세워두고 자리에 앉았다. 좌석은 테이블 하나에 네 명씩 앉는 그런 일반 음식점의 좌석이 아니라 사각으로 빙 둘러진 카운터에 걸터앉는 식이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네다섯 명에 불과했다. 모두가 일본계 사람들처럼 보였다. 벽에 붙은 메뉴도 한자와 히라가나를 섞어 쓴 알 수 없는 하나의 기호에 불과했다. 


기모노를 입은 웨이트리스가 우리 일행이 일본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서 영어로 쓰인 메뉴를 가져왔다. 비록 영어로 쓰여 있어도 상당수 메뉴가 일본어를 발음 그대로 영어로 풀어놓은 것이어서 안주를 시키는데 적지 않은 애를 먹었다. 아무튼 그럭저럭 혀 짧은 일본식 영어를 하는 웨이트리스 아주머니에게 묻고 또 물어서 주문을 무사히 마쳤다. 


“어~휴, 여기는 완전히 일본이네, 일본!” 


우리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K가 말했다. K는 30대 중반으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다. K가 하와이에 온 지는 3년쯤 됐다. 


“하와이에서도 이런 데는 찾기가 어려울 거야” 


J도 한마디 하고 나섰다. J는 30대 후반의 남자로 하와이에 온지는 9년째다. 


“그러게 말이야, 이 집 문밖은 미국이고 안쪽은 일본이네” 


그들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렇게 우리는 따끈한 사케를 한잔 두 잔 주고받았다. 술안주로 삼은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일식집과 일본문화, 그리고 미국에 와서 살면서 겪은 웃지 못할 일들로 이어졌다. 


“내가 처음 하와이에 와서 슈퍼에 갔었는데….” J가 말문을 열었다. “하와이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슈퍼마켓에서 과일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 갔는데, 계산하는 점원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야…” “유 니드 플라스틱...?” “두유 니드 플라스틱…?”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아래위로 굴리며 말하는 점원의 반복되는 말이 J는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고, 차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히 플라스틱 제품을 산 게 아니라 과일을 샀는데 자꾸 플라스틱 어쩌고저쩌고 물어보는 거야…” 점원의 계속적인 물음에도 말을 알아듣지 못한 J는 당황의 도를 넘어 이제 얼굴까지 벌게졌다. J의 뒤로는 계산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 사람들도 J가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 힐금힐금 쳐다보았다. “얼굴은 벌게지지 등에는 식은땀이 나지….” 벌그스레 상기된 얼굴로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애매한 얼굴 표정으로 상황을 대충 얼버무린 후 마켓을 빠져나온 J는 나중에야 그때 점원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건을 사면 담아주는 비닐봉지를 영어로는 플라스틱 백이라고 부르는 것을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J는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플라스틱은 플라스틱이고 비닐은 비닐이지, 왜 비닐봉지를 플라스틱이라고 부르는지 원…” J의 푸념이다. 


(2002, 1.15)




미국에 오면 가장 먼저 힘들다고 느끼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영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낫겠지만 초반기엔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영어를 잘하냐 못하냐를 따지기 이전에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사소한 말들이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점원이 "플라스틱 백"이라고까지만 말해줬어도 아하 비닐봉지를 말하는 거구나 하고 유추할 수도 있지만 그냥 플라스틱 이라고만 말하면 모르는 사람 입장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면 마음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누가 갑자기 말을 걸면 어쩌지? 내가 손해 보는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말하지?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데 입만 열었다 하면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을 텐데... 이런 조바심이 이민생활 초창기의 한인들을 늘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미국에 오면 영어가 금세 늘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부딪히고, 깨지고, 실수하고, 손해보고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아주 조금씩 늘게 되는 것이다. 원어민들과 많이 부딪힐수록 느는 건 당연하다. 그게 싫어서 한인들끼리만 어울리게 되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영어는 전혀 늘지 않는다. 원어민과 어울리려 해도 어른이 되어서 오면 어울릴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어렸을 때 오면 학교에서 원어민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영어를 배우게 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훨씬 나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0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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