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후기
2주 전, 1박 2일 간 가족 여행으로 강원도에 갔었다. 숙소만 예약해놓고 구체적인 일정은 상황을 보아가면서 정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인제 쪽 계곡에 물이 불어있는 모습을 보고 즉석에서 래프팅 하기로 결정. 한바탕 물에서 놀고 난 후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줄을 서더라도 속초로 가서 봉포 머구리집에서 물회를 먹기로 했다. 그 옆에 있는 만석 닭강정을 살 겸해서.
그런데 가는 길에 생각해보니, 속초는 포켓몬 Go의 마을이 아니던가.
광풍이라고 할 만했던 포켓몬 Go 열풍이 한바탕 지나갔지만 아직 국내에는 플레이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언젠가 플레이해 볼 유저들을 위해 포켓몬 Go 체험기를 써본다.
바로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했다. 다행히 미국에 있을 때 쓰던 미국 계정이 아직 접속이 되어서 복잡한 가입절차를 다시 밟지 않아도 되었다.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계정을 만들면 닉네임과 캐릭터를 설정할 수 있다. 캐릭터의 모습은 초창기 메이플스토리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점이라면 2D였던 메이플스토리 캐릭터와 달리 포켓몬 Go의 캐릭터는 3D라는 점. 튜토리얼에서는 만화에서도 익숙한 오박사 님이 나와서 스타팅 포켓몬 세 마리(파이리, 꼬부기, 이상해씨) 중 한 마리를 잡을 수 있게 해준다. 필자는 파이리를 선택했다. 잡고 나면 이름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데, Charmander라는 이름은 어색해서 익숙한 ‘파이리’라고 했다. 포켓볼 100개와 몇 가지 아이템을 받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다.
화면에는 GPS를 이용한 지도가 뜨는데, 길거리까지 세세하게 표시되는 외국과는 달리 속초에서는 거대한 맵만 덩그러니 있었다. 구글 맵이 제대로 연동되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두 사진 중 좌측이 속초에서의 플레이 화면이고, 우측이 일본 오사카에서의 화면이다.
우측 화면에서 보이는 기둥들은 포켓몬 센터 혹은 도장이다. 포켓몬 센터는 교회나 시청 같은, 사람이 많이 몰리는 건물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포켓몬 센터에 일정 거리 내로 접근하면 센터 아이콘이 활성화되는데, 그 아이콘을 터치해서 동그란 화면을 스와이프 하면 포켓볼과 아이템, 또는 포켓몬 알을 얻을 수 있다.
포켓몬 도장은 보통 랜드마크에 위치한다. 가령 낙산해수욕장에 낙산 도장이 있다. 포켓몬을 잡아서 경험치를 얻고 경험치를 모아 레벨업을 하다 보면 레벨 5부터는 도장에 도전할 수 있다. 처음에 도장에 가면 노랑(썬더), 파랑(프리져), 빨강(파이어) 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각 도장을 점령한 관장의 팀이 해당 도장의 색이 된다.
화면에서 가운데 포켓볼 버튼을 누르면 보유하고 있는 포켓몬의 목록과 인큐베이터에서 부화 중인 포켓몬 알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인큐베이터에 있는 알은 각각 지정된 거리가 있는데, 그 거리를 걸어야만 포켓몬을 부화시킬 수 있다. 차량을 타고 움직일 때는 거리가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속도로 이동하거나 실제 걸을 때처럼 흔들림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2km를 걸어서 나온 포켓몬은 고작 단데기였다)
왼쪽에는 갖가지 설정을 할 수 있는 메뉴가 있고, 오른쪽 바에서는 Nearby라고 해서 주변에서 출현하는 포켓몬들의 실루엣 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본인이 보유하고 있는 포켓몬이 주변에 있다면 실제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변에 포켓몬이 등장하면 진동이 울리면서 화면 내에 포켓몬이 나타난다. 포켓몬을 터치하면 잡을 수 있는 화면으로 바뀌는데, 이때 포켓볼을 잘 던져서 포켓몬을 맞춰야 Good, Nice 등의 문구가 뜨면서 볼이 활성화된다. 포켓볼이 빗나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다시 던져야 한다. 이렇게 포켓볼을 던지는 것이 현재 포켓몬 Go의 거의 유일한 오락 요소다. 물론 그만큼 앞으로 더해질 기능들이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맞춘다고 해서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포켓볼을 맞춰도 몬스터가 다시 빠져나오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끔 뜨는 Wild 포켓몬이나 유저 레벨에 비해 몬스터의 CP가 높을 때는 3~4번까지 빠져나오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포켓몬이 도망가기도 한다. 처음에는 포켓볼을 아낌없이 던져댔지만 나중에는 포켓볼이 부족해져서 주변에 포켓몬이 있는데도 잡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포켓볼은 레벨업을 하면 15-20개 정도를 새로 받을 수 있고 각 포켓몬센터에 한 번 방문할 때마다 3-5개 정도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레벨이 오를수록 몬스터를 더 많이 잡아야 레벨을 올릴 수 있고 센터도 한 번 방문하고 나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포켓볼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포켓볼 개수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자연스레 유료 구매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이렇게 포켓몬을 잡을 때 위와 같은 AR(증강현실)이 나타난다.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화면에 포켓몬이 등장하는 것. AR 모드는 끌 수도 있다.
각 포켓몬의 상태를 볼 수 있는 화면이다. 앞서 설명한 이름 밑에는 CP와 속성, 신장과 몸무게, Stardust, Candy가 있다. Stardust와 Candy는 어떠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같은 포켓몬이 많아지면 Candy가 증가하고 일정 수치를 넘으면 포켓몬을 진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중간중간 같은 종류의 포켓몬이 나오면 잡고 보는 게 좋다. (잉어킹의 경우 27마리를 잡아야 갸라도스로 진화시킬 수 있다)
걸어 다니다 보면 5분 정도 걸어야 한번 진동이 올까 말까 한데, 차량으로 이동하면 진동이 쉴 새 없이 울린다. 한 번에 포켓몬이 두세 마리씩 뜨기도 해서 한 마리를 잡고 바로 다른 포켓몬을 잡기도 하는 등 보유 포켓몬 수를 늘리는 데에 확실히 유리하다.
여행 둘째 날에는 속초에 가지 않아서 하루만 하고 깔끔하게 (강제적으로) 그만뒀으니 다행이지, 계속 속초에 머물렀다면 쉴 새 없이 포켓몬 Go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은 불분명하지만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되면 분명 잠도 안 자고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O2O(Online-to-Offline),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이전부터 뉴스나 트렌드 분석 글에서 자주 볼 수 있던 용어들이다. 동시에 포켓몬 Go를 나타내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포켓몬 Go는 수익 모델을 창출하고 콘텐츠 활용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수익 모델 면에서, 이미 닌텐도는 지금 가진 수익원, 즉 포켓볼과 아이템 판매로 올린 수익만으로도 모바일 게임 수익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하지만 기존 모바일 게임에 존재하던 단순한 아이템 판매에서 벗어나서, 포켓몬 Go는 새로운 마케팅 채널을 만들어낼 수 있다. 특정 위치나 상호에 대해 금액을 지불하면 몬스터 출현율을 향상시키거나 희귀한 포켓몬을 수집할 수 있게 한다면? 혹은 특정 장소를 포켓몬 센터나 도장으로 만들 수 있다면? 일정 기간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포켓몬 대회가 열린다면?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검색 키워드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듯이 포켓몬 Go는 현실 장소에 대해서 비용을 지불하고 실제 고객을 유입시킬 수 있다. 온라인 키워드 광고에서는 CTR이나 CPM을 계산하고, 한 번의 클릭이 수익으로 이어질 확률이 상당히 낮지만 오프라인에서는, 특히 식당이나 카페의 경우 그 확률은 온라인에 비해 월등히 높다.
현실 공간의 가상 위치에 대해 비용을 지불한다는 개념이 재미있다. 만약 닌텐도가 이러한 모델을 도입한다면, 초창기에 ‘모바일 땅 투기’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온라인에서 도메인 주소를 선점해서 기업들에게 비싸게 되팔았던 전례가 포켓몬 Go 버전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 중요한 장소나 개발이 유력한 위치의 포켓몬 Go 소유권을 확보해둔 뒤에 판매할 수도 있다. 그 경우 닌텐도는 게임 서비스 업체인 동시에 모바일 부동산 업체가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날 각 정부의 규제들도 어떤 양상을 띨지 궁금해진다.
콘텐츠 면에서, 이런 광범위한 게이미피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닌텐도의 콘텐츠 파워가 부러울 뿐이다. 현재 포켓몬 Go에서 잡을 수 있는 포켓몬은 146종이지만 원작에서는 여러 버전을 거치며 공개된 모든 포켓몬 수가 수백 종을 넘는다. 이렇게 수많은 포켓몬과 진화 구조, 부화, 도장 및 포켓몬 센터 시스템을 기존 콘텐츠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사용자들에게 익숙한 콘텐츠이기 때문에 출시와 동시에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단순히 포켓몬 ‘수집’에 방점이 놓여있지만, 트레이너 간의 ‘배틀’이 중심인 애니메이션에서는 각 포켓몬들의 속성(풀, 물, 전기, 독성 등)과 스킬(패시브 스킬, 공격 스킬, 회피 스킬 등)이 반영되어 전략 게임의 요소도 갖추게 된다. 포켓몬 Go의 게이미피케이션이 일차적인 단계일 뿐이라고 하는 이유다.
애니메이션으로 세계를 정복해온 일본은 이렇게 게임화할 수 있는 콘텐츠가 풍부하다. 포켓몬부터가 OSMU(One-Source Multi-Use)가 가능한 콘텐츠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영화, 캐릭터, 그리고 게임까지 동일한 콘텐츠로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나의 서비스를 시스템과 콘텐츠로 나누어 생각해보면, 주도권을 가지는 쪽은 콘텐츠를 보유한 쪽이다. 포켓몬 Go도 닌텐도의 콘텐츠를 나이앤틱(Niantic)이라는 회사가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번 경우에는 구글 맵을 이용하기 때문에 구글의 사내 벤처로 시작한 나이앤틱과 손잡았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파트너 선택권은 닌텐도에게 있다.
일본에는 [디지몬]이나 [유희왕]처럼 게임화할 수 있는 콘텐츠가 많이 있다. 디지몬은 원작에서 트레이너가 하나의 디지몬만을 데리고 모험하는 시스템이라 변화가 필요해 보이지만 유희왕은 오래 전부터 마니아들이 오프라인에서 카드 배틀을 하고 대회를 열여왔기 때문에 증강현실 및 모바일과 만난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증강현실, O2O, 게이미피케이션을 활용한 서비스들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콘텐츠 파워를 갖춘 기술 활용이라는 점이 포켓몬 Go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다.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의 서비스가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손으로 들고 다니는 모바일과 발로 걸어 다니는 오프라인의 만남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사카에서의 포켓몬 Go 체험기는 여기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