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욘킴 Sep 28. 2024

취향탐구: 미니멀리즘

다시는 3.5톤어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미니멀리즘이 좋다. 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생활양식 전반에 적용 가능한 유연함이 있으면서 정신적인 여유까지 주는 멋진 개념이다. 미니멀리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른데, 나의 생활에 스며든 것은 지난 6년 동안 혼란 그 자체였던 두 번의 이사를 하며 받았던 상당한 스트레스를 치유하면서다.


첫 번째 이사는 옮겨야 하는 짐의 양을 산정하는 것부터 꼬였다. "짐이 좀 많은가?" 생각은 했지만 어지러운 짐더미 속에서 현실감각은 무뎌졌고 대충 2.5톤이면 되겠거니 하는 안일한 태도로 짐 정리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짐 정리가 시작되며, 4년을 지내는 동안 집안 구석구석 곰팡이처럼 자라난 잔짐의 존재를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벽지에 무늬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을 만큼 모든 공간의 사면이 가구로 가려져 있었고, 그 위로 쌓아 올려진 상자와 물건더미들이 천장에 닿고 있었다. 수납을 할 수 있는 모든 장이며 서랍에도 짐이 가득했다. 어지러운 짐더미 속에 흩어져 있던 계약서와 대출 서류, 등기부등본을 한 데 묶느라 스테이플러를 찾아 헤매었는데, (스테이플러, 클립 같은 건 꼭 필요할 때 사라진다) 이 서랍 저 서랍을 열다가 똑같은 스테이플러 5개를 발견한 순간은 정말 고전적인 조크 같았다.


거대한 냉장고에는 잔뜩 쟁여 놓은 음식과 냉동식품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었지만 먹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채소는 시들시들하고 우유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있었다. 5개가 넘는 얼음틀엔 작년 겨울의 얼음이 들어 있고 굴비는 흡사 빙하기에 얼어붙은 고대 생물 같았다.


물건을 추리고, 버리고, 상한 음식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묶고, 버리고, 동네 주민센터에서 받아온 재활용품 관련 전단지에 따라 분리수거 물품을 분류하는 지루한 작업을 꼬박 반나절 내내 반복했지만 짐더미는 줄어든 티도 나지 않았다. 대체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해서 이런 벌을 받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침내 이삿짐센터에서 견적 방문을 왔고, 2.5톤으로는 택도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그렇게 버렸는데...!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날, 너무나 거대해 보이는 3.5톤 탑차가 주차된 승용차들 사이를 낑낑거리며 비집고 들어왔고 그렇게 3.5톤어치 집구석을 통째로 옮기는 첫 번째 이사를 하게 됐다.


두 번째 이사는 2.5톤 더하기 중형차 트렁크 정도로 줄었지만 이번엔 옮겨갈 집의 사이즈를 재는 것에서 꼬였다. "집이 좀 좁은가?" 생각은 했지만 다 들어가겠거니 막연히 기대했고, 손에 쥔 줄자가 이 자리에는 너희 집 냉장고가 들어올 수 없으니 제발 다시 숙고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무시했다. 이번엔 막상 처분하면 아쉬울 것 같은 가전과 가구들에 대한 미련이 발목을 잡았고, 끝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2.5톤어치 집구석을 옮겼다.


이사 당일,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거 못 들어가겠는데?"였다. 짐은 자꾸 밀리고, 이삿짐 아저씨들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고, 나는 짐더미에 밀려 현관 한쪽 귀퉁이에 갇힌 채로 그다지 소용없는 항변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때, 독립하여 몇 년 앞선 미니멀 라이프를 살고 있던 친오빠가 등장해서 상황을 파악하고는 "이것도, 저것도 버려!" 하며 진두지휘를 시작했다.


공간만 차지하던 크고 작은 물건들과 온갖 잡다한 집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이삿짐 아저씨들은 내다 버린 물건들을 처분해 주는 수고비를 챙겨 홀가분하게 떠났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오빠는 새벽 여명과 함께 나타난 마법사 간달프 같았다.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2002), 나팔산성 전투)


이후 며칠 동안은 큰 가전을 처분하거나 저렴하고 작은 모델로 교체하고, 수납장을 버리며 나온 해묵은 물건들은 중고 장터에 팔거나 기부했다. 적정한 값을 알아보고, 처분하는 날짜와 새로 들이는 날짜를 조율하고, 단 돈 몇 천 원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고 장터의 네고 빌런들과 옥신각신 해야 하는 상당한 피로가 동반되는 과정이었다. 이사는 끝났지만 삶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가 몇 주간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모든 것은 마무리가 되었고, 곳곳에 여유 공간이 생긴 새 보금자리는 생각보다 좁지 않았다. 생활양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협탁을 버렸기 때문에 침대 맡에 잡동사니를 둘 수 없었고, 식사 때마다 작아진 냉장고에 들어갈 음식을 신중히 선정해야만 했다. 줄자를 넣어 두는 작은 서랍엔 줄자만 있었고, 한 개만 남은 스테이플러는 프린터 가까운 곳에 덩그러니 혼자 놓였다. 처음엔 일상 속에 생긴 이런저런 사소한 불편함이 낯설었고, 늘 무언가로 채워져 있던 공간들이 비워지자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데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다이어트를 위해 먹는 양을 줄이기 시작한 첫 일주일과 비슷했던 것 같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허기는 아니지만, 항상 약간의 출출함을 달고 사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변화의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는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적어지니 머릿속 생각들도 덜 복잡해졌고, 필요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벽과 바닥에 여백이 생겨 간접 조명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다. 청소가 쉬워졌고, 창문을 열면 구석구석 환기가 잘 되는 것이 느껴졌다. 물건이 줄어든 만큼 생활은 훨씬 단순해졌고, 신기하게도 계속 줄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잠시 방심한 틈에 어지럽혀진 서랍, 벽과 바닥의 여백을 메우는 잡동사니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는 게 보이면 손이 잘 가지 않는 물건을 하나둘씩 버렸다. 치약이나 세제와 같은 루틴형 생활용품을 제외하면 'n개 묶음 상품'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다시는 3.5톤어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반복하며 채우는 것을 경계하고 비우는 것의 쾌적함을 선호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는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었다.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비로소 평온한 한숨을 쉬며 지금까진 대체 어떻게 살았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짐더미 속에서 만성 호흡 곤란으로 살던 삶이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있었다.


"좀 버리고 살자"로 시작한 캠페인은 이제 꽤 성숙해져서 생활 전반에 스며든 취향이 되었다. 물건을 살 땐 가장 중요한 가치에 집중한다. 어떤 것은 디자인이 지배적이고 어떤 것은 기능이 지배적이지만 보통 훌륭한 제품은 둘 다 충실하고 수명이 길며 그에 따른 높은 값을 부른다. 그래서 디자인과 기능에 충실한 좋은 제품을 숙고하는 동안 착실히 돈을 모으고, 제 값을 주고 사서 오래도록 잘 사용한다. 카테고리를 줄이니 선택이 단순해지고, 소모적인 소비를 하지 않으니 저축이 한결 수월해진다. 숙고 끝에 구입한 물건은 좋은 품질에 맞게 잔고장이 적고, 보증기간이 길어 이래저래 쓸데없이 신경 쓸 일도 줄어든다.


헛헛한 거실 한편에 화초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고, 거실의 무드를 책임지는 단 한 개의 액자는 계절에 맞는 그림으로 바꿔주며 즐긴다. 책은 좋아하지만 책 짐을 늘리지 않기 위해 전자책을 충전하고, 종이 질감이 그리울 땐 걸어서 10분 거리의 도서관을 이용한다. 잔뜩 빌려 읽고 가뿐하게 반납하는 동안 스티븐 킹의 공포 소설에 재미를 느끼는 나의 낯선 취향을 발견한다. 인스타그램용 인테리어 보다 커피맛에 진지한 작은 카페를 찾게 되고, 새로운 맛집을 찾아 헤매는 대신 메뉴는 단출하지만 제육볶음 같은 필살기를 갖춘 식당의 단골이 된다. 저녁을 먹으러 갈 때마다 감자조림을 몇 알 더 얹어주는 것을 알아차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복잡한 선택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더 명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혼란스러운 환경으로부터 감각을 해방시킬 수 있다. 삶에 필요 없는 잡음을 줄여 자신을 더 깊이 있게 탐색할 수 있는 건강한 적막을 만든다.


미니멀리즘, 단순히 물건을 줄이는 것이 아닌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자는 메시지는 아름답다. 치장을 걷어내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흐름과 질서에 가까워진다. 아차, 이번 일요일엔 철 지난 옷을 솎아내야겠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