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네
창을 열었는데, 며칠 전과 사뭇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여름의 무겁던 습기가 걷히고 부드러운 빛과 산뜻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다. 여름과 겨울 사이 어디쯤의 기분 좋은 서늘함. 순간, 가을이 온 것을 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고양이가 이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방바닥, 거실 바닥, 여기저기 대충 널브러져 있던 녀석이 두 앞발을 야무지게 굴려가며 이불 안에 작은 동굴을 파고, 버둥거리며 기어 들어간다. 더우면 바닥, 선선하면 이불. 집고양이가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간단하다.
맨발로 거실에 서니 정말 바닥이 서늘해서 발가락이 약간 움츠러드는 게, 이불 안의 고양이가 절로 이해된다. 습관처럼 에스프레소를 뽑지만 얼음을 넣기는 약간 망설여지고 그렇다고 뜨겁게 마시기엔 좀 답답한, 헷갈리는 온도가 거실을 장악했다. 당분간 우리 집 거실의 온도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같은 상태가 유지될 듯하다.
가을은 차분하다. 도시는 채도를 낮추고, 강렬하던 냄새와 떠들썩하던 소리가 잦아든다. 나뭇잎도, 구름도 더 이상 서두르지 않는다. 모두가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걷던 걸음을 늦추고 자연의 느린 흐름에 몸을 맡긴다.
흔히 가을을 탄다지만, 가을의 감정은 복잡하지 않다. 낮 밤의 길이가 바뀌는 동안 잎은 떨어지고 하늘은 맑다. 계절은 그렇게 서서히 정돈되고, 그 안에서 깊고 단순한 감정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나왔는지, 무엇이 남았는지, 어떤 것들이 그리운지. 마음속 깊은 곳에 두고 잊고 지내던 생각들이 고개를 들 때 가만히 앉아 그것들을 꺼내고 솔직하게 마주하면 된다.
일희일비를 반복하는 동안 애증만 남은 회사 생활, 오늘의 운세와 타로점으로 돌려 막기 하던 매일의 운명, 내 안의 가장 어두운 면과 낯선 증오를 발견하였던 어떤 대화, 지켰던 약속, 지키지 못했던 약속. 돌아보면 지리멸렬했던 일상은 이제 지나간 삶의 일부분으로 조용히 녹아든다.
잠시 들춰보는 여름의 감각들은 코 끝과 눈 언저리에 남아 가을, 겨울과 봄을 지나는 내내 그리울 것이다. 뙤약볕 아래서 물청소를 하면 생겨나던 무지개, 여름 여행지에서 핥아먹었던 달콤한 초콜릿 아이스크림, 맨발로 서 있던 모래사장의 감촉과 짭짤한 바닷바람, 웃음소리, 딱딱한 복숭아와 말랑한 복숭아, 젖은 머리를 말리던 선풍기 바람, 잠 못 이루던 열대야와 모기향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이제 여름을 보내주기로 한다. 이래저래 분주하던 마음이 비로소 가을의 풍경을 마주하면, 창밖으로 편안한 한숨 소리 같은 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