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침대 머리맡의 노트 - 11P

11P

by 욘킴

언젠간 닥칠 일들이란 꼭 거대한 빚더미 같다. 현재의 삶을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저당 잡힌 채 많은 오늘들을 상납하며 사는 삶. 희한한 빚쟁이 같은 삶이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날엔, 그런 걸 모르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자유로운 날들. 하지만 단 하루도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어깨를 무겁게 쥔다.

오랜만에 스니커즈 한 켤레를 꺼내 보았다. 갓 성인이 되던 해의 발자국이 담긴 낡은 녀석이다. 검은 가죽은 희게 바랬고, 밑창은 닳고 달아 구멍이 뚫렸다. 이제는 발을 보호하는 단순한 기능조차 하지 못한다.


어린아이와 성인의 경계선에서 열기 속을 헤매이던 날들, 철 없는 호기심의 날들이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발 닿는 곳 어디든 누비려던 새파랗던 시간이다.


묘하게 그리운 기분이 들어 여태 버리지를 못한다. 언젠가 문득 "그랬었지. 그곳이었어. 그 사람이었어" 하는 기억이 제세동기 불빛처럼 반짝이며 나를 순식간에 그 때로 데려다 놓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으로.

이전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느 기사에서 보았다. 사람 적혈구의 수명이 120일이라고 한다. 넉 달 전에 내 혈관을 흐르던 적혈구는 모두 사라지고, 지금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모두 새것이라고. 그리고 한 해가 지나면 내 몸을 이루는 대부분의 성분이 새것으로 바뀐다고 한다. 섭리에 맞게 자연히 소멸한 것들과 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이 채워진 것이 지금의 나라는 단순한 진실. 지금도 나는 조금씩 소멸하고 있다. 이전의 나는 얼마나 남은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상처 위로 굳은살이 베기며 자연히 단단해진 것이 아닌, 모든 아팠던 날들을 망각한 나.
툭하면 쏟던 눈물도 이제는 어떻게 해야 울더라, 울던 자신을 매해 잊어버린 나라는 별 거 없는 사실. 그토록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 애절했던 감정들. 과거의 모든 순간과 감정은 새로워진 몸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쩌면 문득 해묵은 신발을 집어든 건 새로운 세포들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던 이전 내 몸의 신호였던 것이 아닐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침대 머리맡의 노트 - 1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