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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의 디테일: 술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요

by 욘킴

술을 좋아한다 말하려면 얼마나 마셔야 할까? 나는 애주가는 아니지만, 술자리 특유의 들뜬 분위기는 좋아한다. 맛있는 음식에 가볍게 곁들이는 술 한 잔이 주는 여유도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 몸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술이 체질적으로 약한 편이라 몇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결국 세 잔쯤 마시면 꼭 취했냐는 질문을 듣는다. 성인의 사회생활에 가끔 불편할 때가 있는, 나름의 작은 콤플렉스이다.

술을 대단히 잘 마시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소주 한 병 정도는 무리 없이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이 단순한 기준은, 나도 적당히 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는 막연한 바람이 담겨있다. 주량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소주 한 병 정도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보면, 술이 아주 세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적당히 즐거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주량을 가졌구나 싶다. 뭔가 쿨하고 절제미 있어 보이는 주량, 그게 왠지 부러웠다.

특히 ‘소주’라는 술은 나의 유치하지만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로망과도 연결된다. 이를테면 추운 겨울,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연인과 함께 따끈한 국수와 소주 한 병을 나누는 모습. "오늘도 고생 많았어." 그런 다정한 말과 함께 잔을 부딪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떠먹는 순간. 서로 동시에 "캬—" 하고 감탄하며 웃음이 터지면,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고, 행복이란 게 별것 아니구나 싶은 확신이 들 것 같다. 오랜 로망이다.

주종이 무엇이든, 주량이 어떻든, 술에는 삶의 여러 순간이 녹아 있다. 어린 시절, 정체 모를 병을 열어 몰래 한 모금 훔쳐 마셨을 때의 묘한 두근거림. 성인이 되던 날, 설렘 가득하던 그 첫 잔. 비록 술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기대했던 것만큼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에 실망했던 기억뿐이지만, 어른이 되어 이 자리 저 자리에 끼다 보니 함께 자리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같은 술도 맛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았다. 혼자서 마시는 술과 여럿이 함께 마시는 술의 분위기가 다르고, 기분 좋은 날과 우울한 날의 술맛도 다르다는 사실도.

여럿이 함께 마시는 술자리를 말하자면, 처음에는 두 손으로 잔을 받으라느니, 고개를 살짝 돌리라느니 하는 룰을 익히느라 바빴다. 전국적으로 합의된 것처럼 보이지만, 세대마다 디테일이 은근슬쩍 달랐다. 어떤 자리에서는 정석대로 잘 배웠다며 예쁨 받았던 동작들이, 어떤 자리에서는 되레 욕을 먹기도 했다. 아직도 뭐가 정확한 술자리 법도인진 모르겠다. 어찌됐건 각기 다른 분위기에서 약간씩 다른 룰을 지켜가며 취하거나 울고, 웃던 시간들에 대한 추억은 언제 떠올려도 소소하게 즐거운 구석이 있다.

한편, 술은 때때로 용기를 주는 도구이기도 했다. 취기를 빌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순간, 그리고 다음 날 맨 정신으로 그 결과를 감당해야 했던 날들. 어쩌다 무리해서 마신 날엔 끊긴 필름을 이어 붙이며 어젯밤의 자신을 수습하려 애쓰기도 하고, 차라리 기억이 나지 않았으면 하고 이불을 걷어차던 아침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술은 단순히 기호나 취하는 도구만이 아니라 꽤 총체적인 경험인 것 같다. 그래서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보다는 어떤 경험을 원하는지 스스로 아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몇 잔 마시지 못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보다는 좀 더 디테일한 구석을 신경쓰는 취향의 디테일이 생긴다. 어차피 많이 마시지 못하므로 이곳 저곳 메뚜기처럼 돌아다니면서 한 두 잔씩 마시는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우선 좋아하는 사람과 갓 튀긴 치킨에 살얼음이 담긴 500cc 짜리 생맥주를 들이키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때로는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바에서 최대한 덜 무서운 이름의 칵테일을 시키고 로또가 되면으로 시작하는 미래에 대한 온갖 희망사항을 늘어놓는 것도 재미있다. 도심에 몇 남지 않은 펑크록 클럽을 찾아 비닐에 담긴 싸구려 술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것도 꽤 키치한 맛이 있다. 나의 유치하지만 낭만적인 포장마차에서의 로망도 그런식으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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