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연습: 다음 안내까지 계속 직진입니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by 욘킴

개인적으로는 일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요즘 들어 일에 대한 생각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학생이란 타이틀을 떼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그저 돈을 버는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했던 개념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일은 좋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꼿꼿하게 고개를 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흥미를 느끼고, 재미를 발견하고, 가끔은 내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안겨주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믿던 때 말입니다. '좋아하는' + '일'이란 단어의 조합에 슬쩍 기대고 싶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좋아하지도, 돈이 되지도 않는 시간을 지나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일이라는 건 어쩌면 그냥 일일 뿐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신성한 소명이거나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지만 나에겐 그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일지도,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 일은 하루를 열고 닫는 자동문처럼 묵묵히 작동했습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날씨가 흐리든 맑든, 자동문은 앞뒤로 열렸다 닫힐 뿐이었습니다. 그런 무던함은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은 일이다’라는 생각은 그대로 조금 더 흘러가 어느 순간 ‘일은 생활이다’라는 믿음으로 조용히 자리 잡았습니다. 밥을 먹고 그 값을 지불하며, 사람을 만나고, 계절이 매 분기마다 바뀌는 자연스러운 리듬 속에 스며든 무언가처럼요. 좋아하지 않아도, 그렇다고 미워하지 않아도 삶에 녹아든 어떤 기류처럼 자리를 잡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곧 나’라는 지점을 지나고부터는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일을 붙잡고 있는 건지, 일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건지 가끔 헷갈리는 순간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고, 딱히 일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지겹다는 감정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나 관계에 특별히 회의감을 느낀 적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측 불가한 생명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복잡성이 내게 대단히 큰 상처가 된 적은 별로 없습니다. 종종 피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번아웃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좀 어색합니다.


다만 길을 한 뼘쯤 잘못 들어선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정말 사소한 찰나에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곤 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이라든가, 정수기 온수가 데워지기를 기다리는 애매한 틈 같은 시간에 말입니다. 지도상으로는 크게 벗어난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풍경이 익숙하지 않은 그런 느낌.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은 있지만, 확신은 없고, 새 경로를 업데이트하지 않는 내비게이션을 믿는 수밖에 없어 계속 직진하는 중이랄까요.


길을 잘못 든 기분과 실제로 잘못 든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차피 길을 모르니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돌아가볼까 하는 충동에 룸미러를 흘끗거려 보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어긋난 건지 영 기억이 흐릿합니다. 룸미러 안에서 아득히 멀어지다 작은 점으로 사라지는 지난날의 풍경은 그저 막연함만 더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일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말이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갑자기 급정거하라는 극단적인 조언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원래 살아가는 데엔 정확히 옳은 길도, 특별히 잘못된 길도 없으니까요. 쉴 땐 쉬고, 휴게소든 졸음쉼터든 들러가며 천천히 가라는 의미겠지요.

보통은 이런 태도로 스스로를 어찌어찌 타이르며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요즘의 나는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을 내려놓은 순간의 나를 상상하는 것도 낯설어지고, 그 공백을 온전히 나로 채우는 일은 더더욱 서툴러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마냥 채근하고 싶은 마음도 잘 들지 않습니다. 다만 꼭 어디로 가야 한다는 강박보다는 잠시 갓길에 서도 괜찮다던지, 한적한 국도로 빠진다던지, 잠시 지도에서 사라져도 된다는 감각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 길 그 자체라면 말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방향이 잡히긴 하겠습니다. 혹은 애써 찾던 길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뭐, 그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그 모습이 조금 더 나답기를 바랄 뿐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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