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연습: 좋았던 날들의 잔해

좋은 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by 욘킴

어쩌면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달력을 아무 데나 펼쳐 짚어본다 해도, 그날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좋은 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때는 그게 좋은 날인지 몰랐을 뿐입니다.


어떤 날은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여태껏 많은 날을 무너졌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무너지는 중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은 늘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갔습니다. 전철은 정시에 도착했고, 카페는 같은 시간에 문을 열었습니다. 무너진 나에겐 그런 일상조차 잔인하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이 나의 아픔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럴 때면 나는 좋았던 날들의 잔해를 그러모았습니다.


좋았던 날들은 대체로 사소했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낮과 밤, 웃고 떠드느라 커피가 식을 지경이었던 시시콜콜한 대화들. 그때는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기억은 지나간 후에야 좋은 기억이 되고, 의미가 생기니까요. 그런 기억들을 그러모으는 일은 다시 되살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단, 좋은 기억도 분명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기억의 잔해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나의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습니다. 그걸 붙잡는 동안만큼은 조금 덜 외로웠습니다.


아마 그것이 내가 종말을 연습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을 겁니다. 살다가 기어이 마주하게 된 또 하나의 챕터가 끝났음을 조용히 존중하려는 태도라고나 할까요.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수많은 작은 종말들을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매번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쓰다듬으며 버텼습니다.


삶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일의 반복일 뿐입니다. 내가 알던 모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들도 있고, 그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큰 상실을 겪고도 버텨낸 시간이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자신을 놓아버린 적도 있습니다. 버틴다는 말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세상이 얼마나 쉽게 사람의 마음을 부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지나간 얼굴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친구이거나 동료로서, 또는 연인으로 나의 삶에 잠시 발을 들여주었던 사람들. ‘우리’라는 단어를 만들어주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서로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함께 있을 때의 사소한 일들보다, 혼자 있을 때 맞서야 하는 것들이 더 중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파도 위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던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이별하고도 상심으로 죽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그들의 얼굴과 머릿결을 편안히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악몽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하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매일같이 벌어집니다. 언제까지나 계속 벌어집니다. 나는 그런 날들 안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작은 종말들을 연습하면서 말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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