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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21. 2020

함께 그린 기억의 초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la jeune ille en feu)>(2019, 감독: 셀린 시아마)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화면이었다. 화려하거나 동화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투박한데 섬세한, 있는 그대로의 빛이 보였다. 쓸 말은 잔뜩 떠올랐으나 어쩐지 내보내지 않고 고이 모아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안 쓰지 못해, 또 자판을 두드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작품엔 엘로이즈를 그린 세 종류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마리안느가 처음 그리고 얼굴을 뭉개버렸던 초상과, 시간이 흐른 후 다른 이가 그린 초상은 닮아 있다. ‘관습과 전통’을 따른, 남편을 비롯한 남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엘로이즈다. 역시 관습에 따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분노와 사랑이 담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두 번째 초상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 규칙대로 라면 초상화로 분류될 수 없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있다. ‘초상화엔 관습과 전통이 있다’고 했던 마리안느는 끝내 이 그림에 ‘초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야말로, 꾸미지 않은 생생한 순간, 엘로이즈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초상화’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한 기억이 만들어낸 변화다. 그럼에도, 초반에 등장한 후 더 이상 화면에 잡히거나 강조해 언급되지는 않는다. 감독의 시선이 이 초상과 같은 선에 있어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혹은 다른 어떤 ‘궁극적인 예술 작품’이 나온 ‘뒷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엘로이즈, 마리안느, 그리고 소피의 순간, 기억들 자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 이야기 만으로 아름다웠으나, 그 이상의 깊이를 부여한 핵심은, 소피까지 포함된 세 여성의 관계에 있었다. 소피는 하녀, 정보 전달자, 임신한 여성이 아니라, 소피 자체로 작품 속에 존재한다. 셋만 남은 저택에서, 차별적으로 정해진 역할은 사라진다. 소피가 식탁에 앉아 자수를 놓고, 마리안느가 와인을 따르며, 엘로이즈는 식사를 준비한다. 행위 자체만큼 중요한 건, 뉘앙스다. 엘로이즈가 관용을 베푼다,는 느낌은 없다. 소피는 태연하게 어울리고, 엘로이즈는 일과 자유를 즐기며, 마리안느는 둘을 관찰하며 사랑을 누린다. 젠더와 신분에서 벗어난, 평등한 관계가 자연스레 그려진다.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책을 읽고, 잠든다. 소피가 원치 않는 임신에 대처하는 것을 돕고, 시술을 받는 것을 함께 지켜보고, 그림으로 남긴다. 함께하는 순간들에 집중한다.

모닥불 주위 모인 여성들이 목소리로만 만들어낸 음악, 그 어둡게 타오르는 생기와 같은 -엘로이즈의 옷자락에 불이 붙은 모습, 소피가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모습, 엘로이즈의 잠든 모습- 여성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들은 그 자체로 혁명이다. 화가 마리안느 홀로 베낀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함께한 모두가 창조한 그림이다. 횃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지는 않으나, 서로를 평등하게 위하고, 사랑하고, 잊지 않음으로써, 개인적인 혁명을 이끌어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당시 여성들이 원하는 삶을 살기는,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를 되살리기만큼, 혹은 그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한다. 화가이기에 비교적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던 마리안느조차, 그리고 싶은 그림은 몰래 그려야 했다. 엘로이즈의 어머니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고, 본인의 아름다운 기억이 담긴 밀라노로 가기 위해 딸들의 결혼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비겁하고 이기적이었지만-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에우리디케의 의지를 살피지 않는다. 결혼에 묶여 있던 페르세포네처럼, 남자의 ‘사랑’에 끌려 다니게 한다. 죽었다가, 남편의 사랑으로 생명을 돌려 받고, 역시 남편의 사랑 때문에 저승에 남는 상황을 원망 없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소피는 규칙을 어기고 뒤돌아본 오르페우스를 탓하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추억을 남기기겠다는 시인의 선택을 했을 것이라 해석한다. 에우리디케의 목소리를 끌어낸 건 엘로이즈다. 어쩌면 선택한 것은 에우리디케, 남편에게 뒤돌아보라고 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내로, 홍조 띤 볼과 부드러운 입술이 강조된 초상화로 남을, 자신과 같은 여성들에게 서사를 부여한다. “뒤돌아봐.” 흰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부른다. 서로를 아름답게 기억할 것을 약속하며, 완벽한 작별의 장면을 만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작별 후,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그려 아버지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이고, 엘로이즈는 28페이지를 접은 채 포즈를 취했다. 방해 받지 않고 마음을 전하는 법은, 일단 숨기는 것이다. 변치 않은 사랑을 확인해도, 뻗으면 손 닿을 곳에 있어도,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하지 못한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랑의 방향은 서로가 아니라 사랑의 기억에 가까워질 것이다. 마리안느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엘로이즈에게 다가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각자와 기억 사이의 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마지막 롱테이크에 담긴 엘로이즈의 표정은 생생하게 사랑의 기억을 전한다(시점은 다르지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엔딩과 비슷하다.). 자신을 향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모조리 떠올리는 두 눈을 목격하는 마리안느의 시선에서, 관객은 무방비 상태로 벅차오르는 감정을 겪게 된다. “식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던 너를 기억해.”, “카드 게임을 하다 날 노려보는 널 기억해.” 네가 해석한 에우리디케를 기억해, 네가 들려 준 음악을 기억해, 네 그림을 기억해, 뒤돌아봐. 그들만의 기억을 잃지 않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 말도 안되는 세상에 저항하는 법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남성의 시선 속 다소곳한 대상이기를 거부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그릴 것을 요구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그림을 만들어내는, 이것을 그리‘자’며 삶의 생생한 모습을 재현하는 여성. 마리안느의 시선을 통해 화면에 담기기 시작한 엘로이즈는, 단계를 거쳐 끝내 마리안느가 스스로의 누드를 그리게 만들었다. 사랑을 핑계로 한 전형적인 대상화를 깨고, 사랑의 눈을 거친 대상화를, 또한 그 상대를 사랑하는 자신에 대한 대상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가와 대상이 아닌 동등한 개인들로서, 쌍방향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작품 속 배우와 감독의 관계도 그랬기에, ‘여성의 눈으로 그린 여성’ 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은 그대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 소피와 함께 그린 그림들처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
뭐가 더 좋았다고 평가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딱 짚어 설명할 수도 없지만- 배우가 특정 감독과 작업을 하는 경우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연기를 보여 줄 때가 있다. 좀 더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내거나(짐 자무쉬 작품 속 아담 드라이버),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등(토드 헤인즈 작품 속 케이트 블란쳇) -또 그러한 경우 감독의 의도도 해당 배우를 통해 더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듯 하고. 셀린 시아마의 세계 속 아델 아에넬도 그랬다. 뭔가 더 어둡고 여리고 풍부한 느낌이었달까. 전에 함께 찍은 <워터 릴리스>(2007)를 봐야 확실히 알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또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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