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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Feb 14. 2020

낯선 잣대

<문신을 한 신부님>(2019)


 

<문신을 한 신부님(Corpus Christi)>(2019, 감독: 얀 코마사)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영화관에 휴지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엘리자가 마을을 떠나고 리디아는 마음을 열 때, 재소자들에 둘러싸인 다니엘이 결연하게 긴장된 눈을 굴릴 때. 그렇게 그가 맞아 죽거나 정신을 잃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눈물과 함께 자동으로 흘렀다. 그대로였다면, 고민하지 않고 마저 울었을 것이다. 허나 다니엘은 폭력을 피하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싸웠다. 상대를 때려눕혔다. 정신없이 주먹질을 하다 뒷문으로 빠져나가 걸어가는, 피로 물든 얼굴을 비추는가 싶더니, 화면이 기습적으로 꺼졌다. 관객석에서 ‘뭐야’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작품은 영화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분명한 눈물 대신 불편한 고요를 선사했다.


종교와 믿음, 죄에 관한,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작품 <퍼스트 리폼드>(2017)에 대한 글도 이런 식으로, 결말을 곱씹으며 시작했었다. 예상을 깨지만, 딱히 짜릿한 반전이나 시원한 결론을 주지 않는, 어딘가 찝찝한 마무리. 톨러 목사는 고민하고 고뇌하며 인류의 죄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니엘은 고민하지 않고 속죄하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매우 다른 두 성직자의 공통점은, 종교계의 ‘규칙’을 거스르는, 기득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목공은 될 수 있고, 신부는 될 수 없었던 다니엘은, 신부를 ‘사칭’했다. 성직자나 크리스천의 입장에선 사기이겠으나, 신앙이 없는 내 입속엔, 뭐 어때서, 라는 말이 맴돈다.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었던가? 신을 입에 올릴 자격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하는가? 있는지도 모를 초자연적 존재를 대신해, 지친 마음을 의지할 공간을 내주고 나은 길로 가도록 돕는 존재. 엄격한 교육을 수료하고 자격을 부여 받은 ‘진짜’ 주임 신부가 ‘가짜’ 신부 다니엘 보다 그 역할을 잘 했는가? 다니엘은 신부가 되고 싶었고, 잘 할 자신이 있었다. 반 장난의 거짓말에서 도망치지 못해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놀랍도록 잘 해냈다. 바뀌지 않고도, 아니 바뀌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시장, 경찰, 신부까지, 권위 있는 이들이 다니엘을 경계하는 명분은 분명하다. 허나 진짜 이유는, 다니엘을 협박하는 소년원 동기의 것과 비슷한 데가 있을 지도 모른다. 기성 세대들이, 타고난 ‘소질’이 있는, ‘열심히 살지 않는’ 젊은이를 보았을 때 드는 질투심, 고까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따르고 지킨 것을 위협하는 존재를 보았을 때 드는 경계심 같은 감정들. 그 중 누구도 인정하진 않을 게다, 아마 자신들도 모를 테니. 솔직히 깨닫기엔 품위가 넘쳐나니.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는, 어쩌면 배운 것, 투자한 것, 잃을 것이 많을 수록 어려워진다. 그렇지 않았던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권력, 전통, 형식, 규칙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타인의 일엔 본능적으로 새롭고 정확한 잣대를 통해 올바른 해결책을 끌어내는 다니엘은, 언뜻 스스로에게는 약한 듯 보인다. 미루고, 피하고, 순간의 유혹을 마다하지 않는다. 최소한은 속이고, 나머지는 그대로 당당하다. 대놓고 술과 담배를 하고, 오토바이 옆에서 클럽 음악에 맞춰 춤추다 시장을 만나도 머쓱해하지 않고, 사제복을 입은 채로 망설임 없이 자신을 위협하는 이를 머리로 들이받는다. 잠깐 머뭇거리다 엘리자의 키스를 받는 다니엘을 향해 마음속으로 ‘그러면 안 돼’를 되뇌다가, ‘왜 그러면 안 되지?’라는 물음이 문득 떠올랐다. 다니엘이 술병을 든 채 하는, ‘규칙은 중요하지 않다’는,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가 아니라, 알고 있는 자의 말이었다. ‘토마시 신부’인 상태의 다니엘은 존재 자체가 관습에 어긋나는 자, 그리고 그 ‘어긋남’의 의미를 아는 자다. 그의 ‘소질’은, 단순히 말을 잘 하고, 연기를 잘 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에 있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과 껍데기에 불과한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소질이다. 다니엘이 술, 약, 연애를 하지 않는 척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무 생각이 없어서, 혹은 참지 못해서가 아니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소년원 동기가 돈을 요구하며 협박하는 상황이 닥치자, 그는 이제까지 쉽게 살아남고, 관심을 받고 싶어 ‘연기’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관심과 애정 대신 옳다고 믿는 길을 선택한다.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지 않는다. 걷은 돈의 용도를 대강 둘러대고 입막음 용으로 빼돌렸다면, 오히려 별 마찰 없이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다니엘은, ‘가해자’로 몰린 운전자의 장례 비용으로 쓰겠다는 발표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와 갈등을 빚는다. 왜 바르샤바 신학교를 나왔다는 거짓말과, 돈을 장례식에 쓰겠다는 거짓말은 다니엘의 잣대에서 다르게 분류되는가? 전자는 사실fact에, 후자는 진실truth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들과 달리 다니엘은, 형식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금껏 지켜왔던 것을 저버릴 수 없었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소년원 동료의 협박을 통해 단 한 번, 지나가듯 다니엘이 저지른 살인이 언급된다. ‘누구나 죄를 짓고 산다’고 넘기기엔 너무도 분명한 범죄이나, 어떻다고 말하기는 조심스럽다. 그 당시 상황도, 다니엘이 죄를 뉘우치거나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출소하기 전 침대에 앉아 눈을 꼭 감고 고통스러운 듯 기도하던 까닭이 무엇 때문 인가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 사고가 약과 술에 취했던 여섯 명의 잘못인지, 아내를 죽이겠다며 협박한 한 명의 잘못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상실감에 혼란스러웠던 사람들은 ‘악당’을 지목해 슬픔과 분노의 피뢰침으로 썼다. 그것들이 분산되지 않고 밑에 고여 썩어 들어감은 외면한 채. 그 행위는 도덕적 권위가 있는 자의 승인을 받아 명분을 얻고 정당화된다. 다니엘이 운전자의  장례식을 위해 힘썼던 건,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판단해 버린 결과로 발생한 집단적 폭력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테다. 그 집단은, 낯설고 새롭고 흥미로웠던 잣대가 자신들에게 드리워지자, 바로 태도를 바꿔 적대감을 드러낸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처음 마을에 오던 날, 창문이 잠겨 있어 도망가지 못하고 신부 행세를 시작했던 다니엘은, 창문으로 나가 도망치는 대신 신부의 역할을 마무리하기 위해 성당으로 향한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 앞에서 사제복을 벗는다. ‘자, 이 금목걸이와 문신으로 나를 판단하시오.’라는 듯. 모두의 죄와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듯. 오빠를 잃고도 상황을 가장 똑바로 보려 했던 엘리자가, 신부라는 그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문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감싸 주려 했던 것은, ‘토마시 신부’가 없는 마을을 떠났던 것은, 단순히 연애 감정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소년원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모두가 일어나 형식적인 기도를 올리는 동안 소리 나도록 밥을 떠먹는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그리하여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온다. ‘토마시 신부’의 옷을 벗은 다니엘은, 결국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다른 재소자들의 집단 폭력을 묵인하고 망보던, 살아남기 위해 기계적으로 행동하던 그때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흔한 문장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계속 이것저것을 근거로 고민해 봐도,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묵인하던 범죄자, 사람들을 나은 길로 이끄는 신부, 둘 다 다니엘이다. 관객이 그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판단할 수 없는 ‘이상한’,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다니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니엘이었을 뿐이다. 아, 그거다. 다니엘, ‘토마시 신부’가 전하는 메시지는. 당신들은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거다. 작품은 결론을 내리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주위를 경계하던 탁하고 날카로운 눈, 토마시 신부를 바라보던 맑고 여린 눈, 약을 하고 춤을 추던 멍하게 확장된 눈, 피 묻은 얼굴 속 흰자위를 한껏 드러낸 눈, 두려움과 혼란에 흔들리다가도 사람들 앞에만 서면 뚜렷하게 빛나는 눈. 모두 다니엘의 눈이다. 약한 사람들을 변하게 만든 ‘토마시 신부’와 약한 그대로 변하지 않은 다니엘. 두 자아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약함을 알기에 타인의 약함을 감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이 있다면, 그와 인간 사이의 매개체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다니엘과 같이 판단할 수 없는 존재이자, 판단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무엇도 될 수 있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
전혀 다른 종류의 눈빛들을 보여주며, 그것이 한 사람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해내는, 속이 다 보이도록 흔들리다가 다음 순간 미스터리한 분명함을 드러내는 이 그늘지고 창백한 얼굴의 배우, 바르토시 비엘레니아. 그의 낯선 연기는 누구도 다니엘을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준 핵심이었다.


<문신을 한 신부님>(2019).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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