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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Feb 15. 2020

“Little Wom’E’n”

<작은 아씨들>(2019)


<작은 아씨들(Little Women)>(2019, 감독: 그레타 거윅)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Little Women>(2019). IMDB 이미지.


영화는 루이자 메이 올컷이 남긴 말과 함께 시작된다. “내 삶은 그렇지 못했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쓴다.” 각색의 포인트다. ‘즐겁지 못했던’ 현실이 소설과 맞물리는 지점을 그린다. <Little Women>(2019)이 단순 영화화나 리메이크가 아니라 새로운 클래식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린 시절 ‘작은 아씨들’을 읽었을 때엔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쌓인 경험과 흘려보낸 시간의 차이는 아니다. 그레타 거윅이 원작에 없던 것을 집어넣은 것도 아니다. 숨어 있던 것을 찾아 꺼내 놓았을 뿐이다. 이 영화의 힘이다. 각색이 대단하단 생각과, 원작에 그 가능성이 전부 있었다는 생각이 함께 든다. 원작과 원작자를 존중하면서, <작은 아씨들>이 현재에 필요한 까닭을 짚는다. 메시지를 깔끔하고 분명하고 재치 있게 전한다.

과거-조가 쓴 소설과, 조가 베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가 ‘작은 아씨들’을 쓰고 책으로 내기까지의 현재를 과거-소설은 따스한 색감으로, 현재는 차가운 색감으로 교차 편집했다. 그 편집이 절묘해,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숨 돌릴 틈이 없다. 내내 베스의 죽음, 가난한 여성들의 삶이 드리워져 있어 목이 메는데, 자꾸 웃겨서 숨이 넘어간다. 울면서 웃게 만드는, 전형적인 상황들을 전혀 뻔하지 않게 그려내는 것은 감독의 능력이다. 현실은 현실대로 담으면서, 추억은 추억대로 마음껏 예쁘게 그린다. 캐릭터들은 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으면서도 독자적인 매력이 담겨 있다. (이건 물론 배우들의 능력이기도 하다.)  


<Little Women>(2019). IMDB 이미지.


크레딧에는, 분량과는 상관 없이, 조, 메그, 에이미, 베스를 맡은 네 배우의 이름이 나오고 나서 다른 배우들의 이름이 올라온다. 제목이 ’Little WomAn’이 아니라 ‘Little WomEn’인 데에는 까닭이 있다. 꼭 의도치 않게 조의 것을 빼앗는 듯 보이는 에이미까지 -핵심은 네 자매 각자의 서사와 그들 사이의 추억, 현재의 관계다. 마차를 타고 빗속을 달리는 부분도, 프리드리히는 핑계일 뿐, 메그와 에이미가 조를 사이에 두고 꾸민다는 둥 난리치며 즐거워하는 것 자체, 자매들이 함께하는 순간 자체를 그리는 장면으로 느껴진다.


<Little Women>(2019). IMDB 이미지.


그레타 거윅은 네 자매를 스크린으로 옮기며, 그들이 예술가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난한 여성이 예술가의 삶을 살기는 (지금도 쉽지 않지만, 더, 혹은 다른 방향으로) 쉽지 않았던 시대다. 작가 조 마치는 결혼을 포기하고 글에 올인했다. 20달러에 멋대로 편집될 소설을 넘기고 즐거워 시내를 내달렸다. 언니의 결혼을 아쉬워하는 조에게, 배우 메그 마치는 ‘꿈이 너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덜 중요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아내와 배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기에, ‘아내’를 선택함과 동시에 생계는 남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해 미안해했고, 메그는 좀 더 아끼지 못해 미안해했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위했다. 화가 에이미 마치는 스스로의 재능을 자꾸 의심해야 했다. ‘천재도 못 되는’ 여성 예술가는 돈을 벌 방법이 없었으므로, 에이미는 결혼을 하기로 한다. ‘천재라 불리는 여성이 있기는 한가’, ‘천재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누구인가’,와 같은 물음들은 당사자인 에이미가 아니라 로리로부터 나온다. 부유한 남성인 로리가 조를 기준으로 삼아 메그와 에이미를 평가하듯 하는 말은 주제넘다. 흥미롭게도 그 대화를 통해 로리는 에이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에이미는, 차선책으로서의 결혼이 아니라 사랑의 결실로서의 결혼을 하게 된다. 피아니스트 베스 마치에겐 피아노가 없었으나, 특유의 따뜻한 마음 덕에 피아노를 선물받는다. 때론 여성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삶에 치여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각자 생긴 대로 즐겁고 따뜻하게 헤쳐 나가는 네 자매의 모습은, 눈물 나게 멋지다.


<Little Women>(2019). IMDB 이미지.


로리와 조의 타이밍이 맞았더라면 하고 나도 모르게 바랐었으나, ‘왜 둘째가 옆집 소년과 결혼하지 않느냐‘는 출판업자의 말에 푹 찔리고 말았다. 말했듯, 에이미는 조의 들러리나 연적이 아니라 주인공 중 하나다. 조와 로리의 마음이 엇갈렸다고 해서 새드 엔딩도 아니고, 조가 프리드리히와 키스했다고 해서 해피 엔딩도 아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 하나가 아니라 넷이고, 사랑은 이들의 궁극적 목적이나 행복이 아니다. 여성은 ‘사랑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니까.  

조가 (봐주듯) 출판업자가 원하는 대로 결말을 수정하는 장면부터, 관객은 더 이상 추억이 과거 자체인지, 소설인지 구분할 수 없어진다.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기억하고 싶은 색으로 바뀌니까. 조가 선택한 것은 따스한 색이다. 이 장면이 소설 속의 조를 분리해 놓음으로써, 현실의 조는 독자나 출판업자의 입맛이 들어간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는, 실재하는 여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샐리 포터 감독이 <올란도>(1992) 마지막에 덧붙인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하고.)


<Little Women>(2019). IMDB 이미지.

 

프리드리히와 조가 우산 속에서 키스하는 모습이 두 번에 걸쳐 끊어지는 편집으로 나오는데, 약간 불필요하고 어색하게 컷되는 느낌이 들어 의아했다. 다른 씬들은 완벽하게 군더더기 없었는데 왜 이 부분만? 그러고 보니 의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점으로 따지면 현재인 이 키스의 두 번째 부분부터는, 소설 속이라는 신호다. 고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에 연 학교에서, 메그는 연기를 가르치고 조는 프리드리히와 함께 학교를 이끌고 모두 함께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는, 아름다운 엔딩의 색은, 소설에 사용된 따스한 종류다. 동화적인 해피엔딩은 소설의 결말에 해당한다. 이후 영화는 화면을 다시 차가운 현실의 색으로 돌려, 자신의 책을 든 조의, 복잡한, 정의할 수 없는 얼굴을 담으며 마무리된다.

어쩌면, 조와 같은 여성 예술가들의 결말은, 현실의 개개인에게 맡겨 둔다는 뜻이려나. 네 자매와 원작자를 비롯한 당시 여성들을 향한 리스펙이자, 감독 자신과 배우들을 비롯한 현재의 여성들을 향한 격려의 메시지. 무언갈 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응원하면서도, 꼭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생긴대로 존중 받는 기분이 드는 이야기였다. 무지하게 눈물이 났다(그리고 웃겨서도 눈물이 났다). 세상 고전을 모두 그레타 거윅의 작업실에 가져다 놓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Little Women>(2019). IMDB 이미지.



+ 로리나 프리드리히, 존은 어쩌면 각자 이상형의 구체화였는지도 모르겠다. 메그가 원했던 다정하고 수줍고 착한 남자, 에이미가 원했던 귀공자, 조가 원했던 지적인 동반자. 셋 모두 여성의 말을 듣고 존중할 줄 아는 남자. 이들이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자매들의 로맨스 대상이었으나, 각각의 캐릭터들은 매우 매력 있었다.

+ <레이디 버드>(2017)에 이어 열심히 서포트하는 역할에 충실했던 티미. 역시 언급하고는 넘어가야겠다. 티모시 살라메는 그 캐릭터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사랑의 방향을 관객에게 알려 줄 수 있는 배우다. 유럽에서 에이미를 만나고 조가 준 반지를 계속 빼지 않고 있을 때도 그의 마음이 이제는 에이미를 향하고 있음을, 그리고 로리 스스로 나중에 말하듯 그 사랑은 조를 향한 사랑과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자매 같았던 로리. 현실 친구 시얼샤 로넌과 장난치는 케미가 너무 좋아서 소리 지를 뻔 했다. 그레타 거윅-시얼샤 로넌-티모시 살라메 포에버…..)


<Little Women>(2019).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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