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짓>(2018)
<트랜짓(Transit)>(2018,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드)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에 젖을 법한 순간들은 불편하다. 멜리사의 부탁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게오르그의 목소리에 내레이션이 겹친다. 내레이션은 이어지고, 장면은 끊겨, 게오르그가 바이델의 비자를 자신의 것으로 위조하는 모습으로 넘어간다. 죽음의 순간들은 건조하다. 하인츠와 기차 화물칸에 몰래 타고 메르세유에 도착한 게오르그는, 난민을 색출하는 경찰의 소리를 들으며, 친구의 숨이 멎은 것을 알게 된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도망쳐야 했다. 시체를 둘둘 말아 던지는 경찰을 민첩하게 뒤돌아보며 그는 뛴다. 나는 무의식중에 ‘때마침’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는 흠칫 놀랐다.
개를 데리고 다니던 여성과 게오르그는 항구 근처 난간에 기대 담배를 나눈다. 카메라는 게오르그가 상대에게 담배를 말아 불을 붙여 주는 모습을 담은 후, 여자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게오르그가 자기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이는 동작을 클로즈업해 담는다. ‘그의 마음이 아주 편안한 상태였다’고 내레이션이 묘사하는 와중, 카메라가 빠르게 돌아가 여자가 서 있던 곳을 비춘다. 비어 있다. 줌이 던져지듯 아웃된다. 두리번거리는 게오르그가, 난간 아래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떨어진 여자의 시체가 보인다.
바이델의 죽음은, 피범벅이 된 모텔과, 주인의 말로 설명된다. 그는 상황상 소설을 실을 수 없다는 출판사의 편지와, 헤어지자는 아내의 편지를 읽은 후 손목을 그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멕시코로 와도 좋다는 영사관의 편지와, 함께 멕시코로 가자는 아내의 편지는 받지 못했다. 이 비극적 아이러니는 몇 번의 경유를 통해-그가 쓴 소설과 받은 편지를 읽는 게오르그의 말을 들은 레스토랑 주인의 내레이션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바이델의 죽음은 게오르그의 행동에 계기가 되는 ‘기능’을 하는 사건이지만, 그의 존재와 소설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사칭하기 위해 필연적인 과정이기는 했으나, 기차 안에서 게오르그는, 그의 마지막 소설과 받은 편지, 원래 전달하려고 했던 편지를 읽는다. 미친 사람들과 미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는 소설. ‘지옥으로 가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기다렸는데, 바로 그곳이 지옥이었다’는 이야기.
게오르그의 얼굴은 항상 그늘져 있다. 사람들을 가르고 뽑아내는 파시스트들, 수많은 공범들이 만든 그들만의 세상.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비정상적으로 긴장한 상태가 일상이고 ‘정상’이 되었다. 만성적인 피로와 불안을 느끼며, 짓지 않아도 되었을 죄를 짓고,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죄책감에 시달린다.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들을 만난 마리에게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다. 이따위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해 둔다. 죽은 바이델을 사칭한 게오르그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건, 이 이야기의 핵심은 비밀과 거짓말이 아니다.
게오르그가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설정은, 리얼리티를 높인다. 일부러 현대 배경에 역사적 사건을 배치한 까닭은, 파시즘으로 인한 삶의 망가짐이 현재진행형인 문제라는 뜻이다. ‘나치’라고 지칭하는 대신 ‘파시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치 로고가 박힌 카키색 제복의 군인들이 가득 탄 탱크가 지나가는 대신, 사이렌을 울리는 폴리스 벤에서 네이비색 특수기동대 제복을 입고 헬멧을 쓴 경찰들이 내린다. 타자기나 낡은 모텔은 시대 배경을 다시 헷갈리게 만든다. 핸드폰은 의도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듯하다. 현재의 사건임을 강조하면서도, 영화적 분위기,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모호하게 유지한다.
내레이션이 처음 들리는 것은, 메르세유로 향하는 화물칸 안에서다. 다소 뜬금없다. 처음에는 게오르그의 것인가 싶었으나, 곧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애매한 태도와 무심한 말투가 익숙해질 무렵, 레스토랑에서 처음 마르게리따를 먹던 게오르그의 모습을 묘사하며, 화자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전지와 관찰의 경계에서 자아를 완전히 지우지도 드러내지도 않는 그의 존재는, 알 수 없이 불편한 긴장을 발생 시킨다. 화자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불법체류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섣불리 평가하거나 이입하지 않은 채 묘사하고 서술한다. 어떤 부분은 생략하고, 어떤 부분은 굳이 자세히 서술한다. 내레이션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초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는 장치 중 하나다.
게오르그가 자신을 찾아 레스토랑으로 들어온 마리와 포옹하는 장면의 감정은, 조각나 있다. 두 사람은 드라마틱하게 벅차오른다. 화자가 묘사하는 심리가 대체로 게오르그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입해 있던 관객이 그의 설렘과 기쁨을 자동으로 느끼려는 찰나, 내레이션이 막는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것이었는데 -“레스토랑 안의 사람들은 그들의 진한 포옹은 불편하게 응시했다. 불행한 이들에게 남들의 행복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게오르그의 이야기다. 동시에 바이델과 마리의, 리처드의, 개를 데리고 다니던 여자의, 결국 비자를 받지 못하고 쓰러진 남자의, 모텔에서 질질 끌려간 여자의, 멜리사와 드리스의, 그들이 떠난 집에 머무는 가족들의- 영원히 ‘남의 세상’에 얹혀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