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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07. 2020

그들 각자의 와일드라이프

<와일드라이프>(2018)


<와일드라이프(Wildlife)>(2018, 감독: 폴 다노)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객에겐, 직접 겪지 않는 자의 특권이 있다. 거리다. 픽션 영화를 볼 때마다 그것을 누리며 깜깜한 관객석에서 쉽게 울곤 했다. 주로 찾는 작품의 특성상, 그 끝은 대개 후련하기보다 불편했다. 불편함의 종류는 다양했다. <신의 은총으로>(2019)의 끝에 어설픈 분노와 답답함, 빚을 진 듯한 죄책감이 있었다면, <와일드라이프>(2018)에는 지났다고 여긴 시기의 잔해를 맞닥뜨리며 애매한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갑자기 찾아오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현실의 틀 안에서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엘리오의 기억 필터를 통해 그린 ‘그 한여름’인 까닭이다. <와일드라이프>는 조의 시선 필터를 거친 ‘그 초겨울’이다. 아빠는 부재했고, 엄마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제리의 비중이 적고, 자넷이 갑자기 정신 나간 듯 보이는 것은, 조가 받아들이는 만큼을 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부모와 밀러를 관찰하는 조를 관찰한다. 먼저 그의 눈을 한참 담은 후, 그곳에 담겨있던 장면으로 천천히 포커스를 옮긴다. 꼼짝없이 불타는 눈에서 타오르는 풍경으로, 조마조마하게 흔들리는 눈에서 창문 너머 흐린 광경으로. 타인의 삶에 대한 완전한 이해란 없다, 본인이 창조한 허구의 인물이라 해도. 폴 다노(와 조 카잔)도 그것을 아는 스토리텔러 중 하나인 듯 했다. 이것은 조의 이야기이며, 우리는 오로지 그의 뇌 메모리를 훔쳐 볼 수 있을 뿐임을 상기시킨다.


<와일드라이프>(2018). IMDB


그리하여 나는 겨우, 조가 목격했으나 설명하지 못한 부모, 아니 자넷과 제리의 속을, 특권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조의 눈에 비친 그들은 가난하지만 화목했다. 서로를 사랑하는(혹은 그런 듯 보이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 시기의 정체성을 찾았다.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있다. 곧 무너질 불안하고 허술한 테두리임을 몰랐으므로.


<와일드라이프>(2018). IMDB


‘남편이 일하고 자신은 집에 있기로 했다’고 말하는 자넷이 불안해 보였던 것은 부도 난 수표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다. ‘영원하지 않을’ 서른 넷의 그녀는, 아마 조를 임신해 대학을 중퇴했을 것이다. 애써 제리의 자존심을 지켜주다, 그가 산불 현장에 가기로 하자, 폭발한다. 돈 벌러 간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뒷바라지’ 하는 현모양처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들을 태우고 현장에 가지만 제리를 챙기기 위해서는 아니다. 조가 아빠의 ‘선택’을 직접 ‘목격’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관객은 조의 입장으로 바라보니 의아했을 수 있겠으나, 자넷으로선 ‘갑자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눌러 왔던 것들이 터져 나왔다. 자넷이 원했던 것은 경제적 심리적 안정일 따름이었을까. 아니 오히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다른 남자를 만난 것은 아마도, 폭발 이후의 불안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아무도 그녀가 남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도 살아갈 수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홀로 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제리의 선택에 동요하지 않고 생활을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와일드라이프>(2018). IMDB


일자리를 잃은 제리는 자넷이 일을 구하자 자존심 상해 했다. 전형적이나, 섣불리 비난하긴 힘들다. 가부장이 돼야 한다는 압박(인 지도 몰랐을 압박)을 받으며 자라 왔을 남자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가난은 다른 얼굴로 숨통을 조인다. 해고의 명분인 ‘선을 넘었다’의 진짜 뜻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내내 겪었을 것이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어도 될 변화들이었다. 산불에 그을린 제리가 밀러의 집에 불을 지른 심리는, 보기보다 복합적일 게다. 반대로 밀러가 제리에게 딱히 화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넷과 제리가 자신의 삶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자넷을 ‘빼앗을’ 생각 같은 것 없었다. 가난한 자들은 유희의 일환이니까. 처절하게 발랄한 자넷에게 이끌려 억지로 춤을 추는 조를 비스듬히 기대 관람하며 시가를 빠는, 조 앞에서 망설임 없이 자넷의 입술을 끌어당긴 입이, 소리 없이 말한다.


<와일드라이프>(2018). IMDB


가난과 가부장제적 강박은 관계와 삶을 무너뜨렸다. 자넷과 제리는 서로를 불태우곤 각자의 메마른 안정을 찾았다. 따로 살기 시작한 후, 일자리를 구해 아파트에서 지내는 자넷과,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요리하는 제리는 비로소 어른 같아 보인다. 자넷과 제리를 비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조다. 조의 인생은 존중 받지 못했다. 각자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들을 핑계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 그나마 봐줄 만 하지만, 그건 그들이 다행히 어른인 척 하는 법을 완전히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는 관찰한다. 뭘 해달라, 뭘 하지 말라, 난 이것을 원한다,고 요구하는 대신, 눈치 보고 목격하고 질문한다. 그러다 멈춘다. 포기한다. 지키려고 애쓰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 그 밑에 깔리는 대신 빠져나와 세계를 버린다. 부모를 내버려두고 방에 들어가 불을 끈다. 그제야 부모는 비로소 조를 제대로 본다. 부모가 홀로서는 과정에서 강제로 폭력적인 성장을 겪은 조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전구의 불을 끄는 것 정도였다.


<와일드라이프>(2018). IMDB

 
그리하여 조는, 부모를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로 초대한다. 그가 처음으로 한 요구는, 사진이다. 조가 배치한 의자에 띄엄띄엄 앉은 셋은, 가족이라는 덩어리 보단 제리와 자넷과 조 각각으로 존재한다. 조가 앉기 전,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은 주저하며 서로를 응시한다. 클리셰적으로 따지면, 붕괴된 가족의 모습과 실낱 같은 희망 정도가 되겠으나, 어쩌면 차라리 이 어색한 사랑이 낫지 않은가. 적당히 가난한 가족은 경우에 따라 떨어져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허나 이 또한 감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wildlife’를 ‘선택’한 조 앞에서는 오만한 문장일테다. 조였기에 그 정도로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나 -그 속이 얼마나 새카맣게 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와일드라이프>(2018).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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