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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Dec 01. 2019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태도

<신의 은총으로>(2019)


 
<신의 은총으로(Grace a Dieu)>(2019, 감독: 프랑수아 오종)
 
*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언가를 포장하려는 의도로 그릇되게 쓰여 본래의 의미를 잃은 말들이 있다. ‘Grace a Dieu 신의 은총으로도 그 중 하나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덮는 가톨릭 교회의 위선에 이용됐다. 아동 성폭력 범죄를 지속적으로 저지른 신부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피해자에게 교구 상담사는, ‘신의 은총이 치유해 줄 거’라고 말한다.


<신의 은총으로>(2019) 트레일러.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이가 프랑수아 오종이어서 다행이었다. 오종스럽지 않은 소재라고 의아해 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언뜻 어울리지 않아 보이나, 오종스러움의 장점이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그의 시선에는 인물에 대한 존중이 가득하다. 이번엔 실제를 바탕으로 했기에 더 신경 쓴 듯 하다. 적절했고,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으나)고마웠다. 연출력을 과시하려 들지 않고 조심스럽게 집중해 오히려 돋보였다. 주인공은 감독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들 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드라마틱한 기승전결이나 카타르시스 없이, 영화적으로 완벽하며 정치적으로 균형 잡혀 있다. 머리말 없는 책처럼 시작과 함께 본론으로 들어간다. 깔끔하게 핵심을 짚으면서 각각을 섬세하게 클로즈업한다. 필요한 정도로만 표현하며, 필요한 것은 놓치지 않는다. 구체적인 피해 내용은 인물의 말을 통해, 과거의 기억은 화면의 색과 상황, 음악, 프레나와 아이들의 표정을 사용해 은유적으로 담는다.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장면은 없다. 고통이 포르노화 될 요소는 모두 피한다.
 

<신의 은총으로>(2019) 트레일러.


작품은 사건을 단순화해 받아들이기 쉽게 극화하지 않고, 디테일을 최대한 담아낸다. 몇 가지 부분을 언급해 보겠다. 먼저, 문제의 초점을 정확히 맞추고, 뭐가 뭔지 구분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교회의 태도를 짚는다: 알렉상드르가 교황청에 편지를 쓰자, 담당 신부는 그를 불러, ‘당신 덕에 소아성애와 동성애를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고 미소 짓는다. 알렉상드르가 ‘범죄와 성적 지향은 다르다’며 정색하지만, 사과하지 않고, “물론이죠, 그치만 교회가 진보하고 있다는 신호예요.” 라며 터무니없는 말을 굳힌다. 또한 회의나 기자회견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자세히 담으며, 범죄자 프레나 뿐 아니라 대처 없는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의 침묵이 다른 결백한 성직자들을 모욕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각 피해자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 가능한 행동의 범위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제니퍼는 임마누엘에게 ‘당신 빼고 다 부자’ 라고 비꼰다.(그 점이 모임에 층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임마누엘은 함께하며 비로소 삶의 가치를 찾았다고 말한다.) 프랑수아에게 울며 전화를 건 트리스탄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알렉상드르가 찾아간 피해자는, ‘당신은 다 가졌지만 내겐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 반응을 상대적 박탈감이나 피해의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기댈 곳이 없어 자꾸 최악을 상상하게 된다면, 싸우기로 마음먹기가 더욱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알렉상드르와 프랑수아는 돈도 가족도 지위도 있었으니 마음먹기 쉬웠다’는 게 아니다. 정도와 형태는 다르지만, 그들 모두 고통스러운 기억의 무게를 진 채 살아간다. 그 상태로 알렉상드르는 무려 2년 동안 편지를 썼고, 프랑수아는 일일이 전화를 걸어 사람들을 모았다. 문제는, 가해자가 인정했고, 증언이 모였음에도, 피해자가 또다시 나서서 힘들게 싸워야만 하는, 누구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 폐쇄적인 가톨릭 교회에 있다.  
 
‘신의 은총으로’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바르비앵의 말실수가 바로 본심이다. 프레나가 몇십 년 동안 범죄를 저지르면서 처벌 받기는커녕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뒤에 있는 침묵의 권력 체제 덕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배제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려는 노력 없이 모든 것을 기도로 귀결시킨다. 듣기 좋은 말만 두루뭉술하게 읊으며 아무것도 정확히 하지 않는다. 알렉상드르가 편지로 피해를 호소하자 프레나와 마주하게 하고, 결국 먼저 말을 꺼내게 만들고, 프레나가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그냥 서로 손잡고(!) 기도하며 급히 마무리하는 모습은 끔찍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2차 가해다.
 

<신의 은총으로>(2019) 트레일러.


알렉상드르가 수많은 편지 끝에 한 고소를 시작으로 각 인물이 차례로 등장하며, 포커스가 옮겨 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기억은 그들을 구성하는 요소이나, 정의하지는 않는다. 작품은 저마다 삶의 방식이 있는 개인들이 기억과 만나며 겪는 감정을 자세하고 신중하게 묘사한다. 서로 닿아 이야기를 나누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싸움을 진행하며 지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지기도 하는 모습을,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설득력 있게 담는다. 클리셰적 갈등과 화해 공식을 넣어 인위적으로 감정을 고조 시키지는 않으나, 하나하나의 심리를 화면의 중심에 놓는다. 군더더기 없이, 두 시간 반이 꽉 찬다. 절대 과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싸움은 교회 안에서 해야 한다는 성실한 신자 알렉상드르, 자극적인 방법을 써서 라도 세상의 주목을 끌어야 한다는 무신론자 프랑수아, 이제 가족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질, 모두 함께 환속을 해도 좋겠다고 했다가, 그냥 내 생각일 뿐이라고 덧붙이는 임마누엘. 목적이 같다 해서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그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태도도 다르다. 프랑수아의 부모는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알렉상드르의 부모는 괜한 일을 들춘다고 비난한다. 임마누엘의 아빠도 마찬가지다. 그의 엄마는 그때 아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단체 일을 자발적으로 돕는다.
 
작품은 어떤 ‘자잘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다. 둘 다 피해 경험을 공유한 관계지만, 서로를 힘껏 지지하는 알렉상드르-마리 부부와 달리, 임마누엘과 제니퍼의 관계는 때로 폭력적이다. 누구 하나의 탓으로 돌리긴 힘들다. 자신도 피해 경험이 있음을 고백하는 마리의 말을 들은 후, 임마누엘의 눈은 허공을 응시한다. 단순히 마리의 과거를 전달하는 성격의 장면이 아니다. 고백하는 마리의 순간과, 고백을 들은 임마누엘의 순간이 각각 존재한다. 그가 엄마에게 과거 일을 묻는 장면도 비슷하게 복잡하다. 감독도 배우도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신의 은총으로>(2019) 트레일러.


여전히 서로 의지하고 지지하지만 의견 차이도 있는 채로,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프랑수아는 조수석에 기대 자는 알린을 보며 미소 짓고, 임마누엘은 홀로 걸어가다 멈춰 서서 불이 환한 교회 탑을 올려다본다. 공소시효는 연장됐으나, 프레나에 대한 처벌은 아직 아무것도 정해 진 게 없다는 문구를 보며, 정말 뭐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게 영화는 끝났으나,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알렉상드르는, ‘아직도 신을 믿냐’는 아들의 물음에, 답을 망설인다. 만약 신이 있다면, 프레나를 용서하고, 바르비앵이 본인을 입에 담도록 허락하는, 자신과 인간을 잇는다는 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폭력을 방관하는 신이 정말 신이라면, 신은 대체 무엇인가. ‘환경오염도 신의 뜻일지 모른다’던, <퍼스트 리폼드>(2017)의 큰 교회 신부가 문득 떠오른다.
 
정체 모를 신이나 그 이름을 이용하는 교회와 달리, 프랑수아 오종은 이 영화가 무엇이어야 하고 무엇이 아니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유사한 피해 경험을 했더라도, 이해한다는 말을 가볍게 뱉거나 고통의 형태를 짐작하는 건, 폭력적인 태도일 수 있다. <신의 은총으로>는 그 정 반대에 있는 작품이었다. 두 시간 내내 흐른 눈물의 까닭을 설명하기 꺼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의 은총으로>(2019)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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