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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03. 2020

지금의, 제이미 벨 (2)

제이미 벨(Jamie Bell) (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2017, 감독: 폴 맥기건)
<스킨(SKIN)>(2018, 감독: 기 나티브)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가와 레녹스는 ‘주인공’(<설국열차>에서는 커티스를 지칭하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를 주인공이라고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따옴표를 붙였다) 옆에 있는, 속은 다 보이지만 딱히 깊거나 입체적인 심리 변화를 보여 주지는 않는 인물들이었다. 이번엔 앞 글에서 언급한  ‘댄스 씬’이 등장하는 <필름스타 인 리버풀>과 더불어 <스킨>까지, 보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드러내는 제이미 벨을 화면의 한가운데서 한껏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꼽아 봤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실화 바탕이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사족: 원제는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 ‘Don’t Die’를 뺀 까닭이 짐작은 가지만, 뉘앙스가 달라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번역이다.)로 들어가, 사랑스럽고 멋진 로맨티스트, 피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실존 인물 피터-라기보단 제이미 벨의 피터-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대강 짚고 넘어간다. 스코틀랜드가 배경이었던 <필스>에서와 비슷하게, 그의 목소리는 툭툭 뱉는 특유의 억양과 만나 더 탁하게 들리는데, 너무도 어울려서 딱히 인식하지 않고 있다가 문득, 심각하게 매력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딱히 아주 폼을 잡거나, 있는 척하지 않는다. 스타도 엘리트도 아닌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는, 지금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의 태도. 담백하게 말을 던지고 건들건들 움직이는데, 허세는 없다. 그 자연스러움이 멋지다. 어느 곳에 누구와 있건 변하지 않는 그대로 잘 어울릴 것 같다.

작품은 81년 현재와, 과거를, 피터가 문을 여는 모습을 통로로 삼아, 아주 약간 타임슬립 판타지 뉘앙스로 교차 편집했다. 이 글에서는 편집 순서보다는 실제 사건 순서로, 과거의, 글로리아를 사랑해서 행복해하는 피터와, 현재의, 글로리아를 사랑해서 괴로워하는 피터를 이어 묘사하겠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작품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까닭이나 단계를 세세하게 늘어놓는 대신, 단편적인 순간들을 짧고 굵게 감각적으로 던져 놓는다. 감독이 두 베테랑 배우의 깊고 풍부한 표현력을 믿고 택한 방식이지 않을까 싶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그 시작은, 피터가 글로리아를 목격하는 순간이다. 몸을 푸는 글로리아를 열린 방문 사이로 보며 웃는다. 따지고 보면 훔쳐보는 건데, 들켜도 그냥 스스럼없이 인사할 듯한 정도로 대충 숨어 있다. 그녀가 하던 것을 계속하기를 바라면서도, 어느 순간 멈추고 이쪽을 돌아봐 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신기해하고 궁금해하며 웃는데, 비웃음은 아니다. 순수하게 눈앞의 광경에 빠져들며 즐거워한다. 어두운 구석이 전혀 없다. 눈썹을 살짝 팔자로 모으고, 입도 모아 다문다. 아마도, 그는 그 순간부터 글로리아를 조금씩 사랑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제이미 벨이 말해주고 있었다.

다음이 바로, 그 ‘댄스 씬’이다. ‘이상하게도’, 처음 인사를 나누자마자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춘다. 제이미 벨은 춤을 추는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즐겁게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데에 집중한다. 평소에 춤을 즐기는, 출 줄 아는 사람의 무브다. 그냥 제이미 벨 같기도 한데, 순간순간 글로리아에게 던지는 시선을 보니 완전히 피터다. ‘트라볼타는 미스캐스팅’이라는 말은, 어쩐지 당연하게 들린다. <토요일 밤의 열기>를 보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 춤은, 그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이후, 글로리아는 대놓고 관심을 보이고, 피터는 눈치 챈다. 똑같이 끌어당기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신호를 선선히 받아들인다. 어깨를 살짝 굽히고 가벼운 건들거림과 수줍은 쭈뼛거림이 섞인 자세를 하고. 제이미 벨은 그 담백하고 미묘한 태도를 정확히 표현해줬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춤이 두 사람 사이를 훅 끌어당겼다면, 영화를 본 후의 대화는 서로에 대한-주로 피터가- 감정을 진지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글로리아의 말을 듣고, 또 바텐더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홀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한다. 대화는 하는데, 정신은 다른 곳에 있다. 아마도, 스스로 사랑에 빠졌음을 깨달은 듯하다. 아이가 넷 있다거나, 오스카를 탄 적이 있다거나 하는 정보들 자체에 반응한다기보다, 사랑하고 있어서 그 말들에 갑자기 의미가 생긴 것 같다.

피터는 자신의 말에 눈물과 화를 터트리는 글로리아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며 얼었다가, 사과를 시작한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이 관계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두 손을 내밀며 사과하고, 뒤로 밀려나면서도 계속하고, 속상해서 또박또박 말을 잇는 글로리아를 심각하게 보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키스한다. 물론 인물의 행동은 이미 각본에 쓰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설득력을 부여한 건 제이미 벨이다. 약간 애매하고 어색했던, 전형적이지 않아 의아했던 표정들이 사실은,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음을, 키스와 함께 한순간에 납득시킨다.  


연극을 통해 성공적으로 컴백한 후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글로리아 곁을 피터는, 자랑스럽게 지킨다. 함박미소를 지으며 키스하고, 어깨를 두르고, 자신의 손을 벗어나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녀를 흐뭇하게 지켜본다. 질투심이 들면 솔직하게 말하고, 괜한 자격지심에 배배 꼬이지 않는다. 표정이 약간 불안하게 굳었다가도, 글로리아를 보면 자동으로 웃음이 떠오른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작품은 딱히, 피터의 가족이 둘의 관계를, 정확히는 ‘나이 차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넣지 않는다. 이미 유대감이 자연스러운 상태, 글로리아를 단순히 피터의 연인 이상의 독립적인 정으로 대하는 모습을 담는다. 관계 자체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단 한 번 나온다. 글로리아의 집에서다. 그녀의 언니는 나이를 물으며 비아냥거리고, 엄마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제발 결혼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피터는 표정이 굳고, 후에 그에 대해 연인에게 묻지만, 캐묻거나 떠보지는 않는다. 잠깐 고민하듯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진지하게 바라보며, ‘상관없다’고 한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데, 의심하고 다툴 시간 따위 없다는 얼굴이다. 후에 갈등의 불씨가 되리란 불안감은 들지 않는다. 제이미 벨이 여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터의 사랑은 솔직하고 곧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면서, 관계에 의존하거나 관계를 핑계로 삼지 않는다. 온몸을 던져 하는데, 맹목적이거나 파괴적이거나 가볍지 않은, 세상 건강한, 이렇게 순수한데 순진해 빠지지는 않은 사랑. 그는 사랑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 그리고 스스로 사랑하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피터가 된 제이미 벨을 보고 있으면, 그 또한 이렇게 멋지게 사랑하는 사람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가끔 그의 연인은 농담에 화내거나, 알 수 없는 순간 우울해진다. 물론 그녀에겐 까닭이 있으나, 타고난 사랑꾼인 피터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이상 한계가 있다. 그가 대처하는 방식은 오로지 사랑과 배려다. 스스로도 자신이 글로리아에게 꼼짝하지 못함을 알고 있으며, 그에 만족하고 기꺼이 끌려 다닌다.

그러나 무조건적이지는 않다. 글로리아가 말없이 외출하고, 터치를 거부하자, 피터는 불안해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의, 자꾸 말을 돌리고 숨기는 글로리아를 불편해하고 어색해한다. 왜냐면 그는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핑계로 집착하거나 가두지는 않으나, 이 쎄함은 참지 못한다. 솔직하고 밝게 풀어보려 하는데 되지 않자, 결국 소리를 높인다. 상대를 똑바로 보며 얼굴을 내밀고, 탁하고 곧게 내지른다. 화도 왠지 그답게 낸다. 이 분노는 이해되지 않는 답답함과 속상함으로부터 나왔다. 글로리아가 원한다면, 언제든 누그러트릴 준비가 돼 있는 종류의 것이다. 후에 구급차를 부른 형에게 화낼 때는 다르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정말 한 대 칠 듯 소리를 지른다. 이것은 진짜 화다. 제이미 벨은 상황과 상대에 맞는 태도로, 정확하게 피터의 심정을 대변한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그렇게 헤어졌다가, 작품의 첫 부분에 나오는 -글로리아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다시 만난 것이다. 싸운 상태고, 피터는 글로리아가 죽어 간다는 사실을 모른다. 약간 차갑고, 화나 있는 채로 말을 툭 던진다. 그러나 아픈 연인을 본능적으로 챙겨주다가, 결국 다 풀어진다. 화내는 것을 포기했다기보단, 잊은 것 같다. 참으로 일관성 있는 인물이다.


피터가 본격적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은, 의사와 통화하며 그녀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 후부터다. 이미 근심이 가득하던 얼굴이, 멍해진 채로 굳는다. 입술만 겨우 움직여 되묻고는, 고개를 미세하게 흔들다가 못 견디겠는 듯 숙인다. 잔뜩 울다 지치고, 글로리아를 설득하려다, 결국 그녀를 이기지 못하고 풀이 죽는다. 묻는 가족들에게 까칠하게 대하다, 이미 울음이 터져 나와 붉어진 얼굴로 털어놓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가족과 글로리아에 대한 그의 애정을 저울질하는 연출은 아니다. 그가 너무 사랑해서 괴로워하고 있음을, 있는 힘을 다해 참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사촌과 이야기를 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잇다가, 피터는 마침내 울음을 꾹 삼키며 ‘너무 사랑해서 괴롭다’는 말을 뱉어낸다. 눈물을 슥 닦아내고 바로 웃는다. 제이미 벨의 뺨은 솔직하다. 과거 장면들에서, 그의 뺨은 사랑 때문에 붉어져 있었다. 현재는, 슬픔을 참느라 붉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글로리아를 떠내 보내기 직전, 피터는 아주 가느다란 소리로 ‘비행기를 타고 가다 그녀가 죽을 거’라고 중얼거린다. 물론 말대로의 걱정도 있지만, 헤어지기 싫은, 아이 같은 감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떼쓰지 않는다. 피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글로리아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존중이라는 분명한 기준이 보인다. “You look beautiful Gloria, forever.” 꽉 잠겨 떨리는 소리로 그 작별 인사를 겨우, 그러나 진심을 가득 담아 담백하게 속삭이고, 그녀를 보낸다. 차가 떠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운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두 사람이 무대에서 셰익스피어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피터는 배역에 이입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된다. 슬프고, 사랑해서 괴롭고, 복잡한데, 결국 단 하나로, 사랑 그 자체로 모이는 감정을 온몸 가득 담으며, 상대에게 집중한다. 세상에, 제이미 벨의 피터만큼 꽉 채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피터에게 집중하다 보면, 그를, 그의 사랑을 존경하게 된다. 임종을 지킬 수는 없었지만, 글로리아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 마지막 사랑은 피터라는 것. 그에 의심이 들지 않게 한 것은 제이미 벨이었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같은 설정을 가지고도 이 인물을 ‘어떤 것’으로 그리느냐는, 창작자의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 글로리아는, ‘젊지 않은’ 배우, 여성, 연인,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그녀에겐 엄마와 자매가 있고, 자녀들이 있으나, 딸, 엄마, 자매로서의 모습엔 비중이 실려 있지 않다. 피터에겐 일이 있고, 가족이 있지만, 작품 속에서 그 관계들은 글로리아를 사랑하는 그를 그리기 위해 등장한다. 그가 무대에 서는 장면은 괴로움을 삼키는 모습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피터는, 글로리아를 사랑함으로써 존재한다.

영화 속 하고 많은 이성애 로맨스 라인에서, 남성에겐 대개 일과 사랑 모두 있었다. 오로지 사랑을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쪽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 반대는 어떨까,에 대한 답을, 제이미 벨은 훌륭하게 내려 줬다. 그렇게 관객은 글로리아를 사랑하는 피터를 따라, 글로리아를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사랑하고, 제이미 벨을 사랑하게 된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여기 또 하나, 실화 바탕의 영화가 있다. 실화를 다루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필름 스타 인 리버풀>은 아름다운 화면과 감각적인 연출로 관계와 감정에 집중했다. <SKIN>(2018)은 장면장면에 긴장을 가득 채워,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며,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번에 제이미 벨은 ‘그 인물이 되는 방식’을 택했다. 몸을 불려 근육을 지우고, 머리를 밀고, 미국식 억양과 더불어 목소리의 탁함을 줄이고 톤을 낮추는 등의 변화도 물론 있었으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스크린 속 그에게서, 자신을 완전히 지운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는데, 브라이언에게서는 정말, ‘제이미 벨’이 보이지 않았다.


<스킨>(2018) 스틸컷. IMDB.


아빠’와 ‘엄마’의 가장 총애하는 아들, ‘뱁스’. 그가 ‘전향’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분명 있지만, 갑자기 어떤 선을 훅 넘어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다. 굳이 누가 말로 하지 않아도, 관객은 브라이언이 파시스트들과 행동하는 것은, 그를 받아 준 것이 파시스트였기 때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브라이언이 따른 것은 이념이 아니라 집단, 혐오가 아니라 정, 유대감 같은 것 따위였다는 것을. 중간에 줄리에게 털어놓듯, 갈 데 없는 자신을 받아 준 공간이, 그의 성장과 맞물려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신과 함께 피부에 박혀 버린 거다. 항상 옳지 않다는-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무의식 중에 존재했기에, 그것을 지우려고 자꾸 더 많은 것들을, 특히 ‘얼굴에’ 입혔는지도 모른다. 제이미 벨은 그의 ‘변화’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의 문신에 가려져 있던 예술가, 로맨티스트, 여린 소년을 관객이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감옥에서 나온 브라이언은 자신이 해한 아이 어머니의 분노를 그대로 받는다. 맞대응하거나, 비웃거나, 도망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잘못을 알아버린 사람처럼 얼어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피곤을 핑계로 멍한 상태를 유지한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지쳐 있었는지도, 아예 처음부터, 지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과 배우가 집중하는 것은 브라이언의 그런 모습들이다.


물론 파시스트 시위대 맨 앞에 서서, 목이 나가라 소리를 지르거나, 경찰에 끌려갔을 때 바지를 내리고 문신을 보여 주기도 한다. 허나 그런 순간에는 감정, 이를 테면 분노나 즐거움 같은 것이 별로 잡히지 않는다. 단순히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분노에 진심이 실려 있는 순간은, 슬레이어가 억지로 보스와 다른 개를 싸움 붙였을 때이고, 폭력에 의지가 실려 있는 순간은, 줄리 아이들의 무대를 비웃는 멤버를 응징할 때다.


<스킨>(2018) 스틸컷. IMDB.


줄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파시스트 집단 멤버가 아닌 브라이언 자체가 된다. 수줍어하고, 장난치고, 그러다 갑자기 숨이 멎을 정도로 진지하게 로맨틱해지고, 온몸에 진심이 흘러넘쳐서 어쩔 줄 모른다. 자꾸 상대를 눈과 손과 뺨에 담고 싶어 한다. 새벽 세 시에 전화를 받고 나가는 브라이언을 보며 줄리는 화내고 어이없어한다. 아마 그녀가, 무뎌져서 모른 척하고 있던 감각을 일깨웠던 것 같다. 창고에 휘발유를 뿌리고, 그 옆방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잠깐 굳어 있다가 재빨리 손가락을 입에 대곤 옆문을 가리킨다. 어둠 속에서 확장돼 빛나는 두 눈엔 망설임이 없으나, 공포는 있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다른 장면 중 하나는, 데지레의 문신을 보고 공격적으로 물을 때다. 오히려 슬레이어가 총으로 협박하며 이주노동자를 죽이라고 협박할 때는, 당당히 맞선다. 아끼는 이들이 위험할 때, 스스로의 행동에 혐오감이 들 때, 그는 공포를 느낀다. 제이미 벨은 브라이언의 진심과 심리와 감정 같은 것들을 관객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직관적으로 와닿도록 해 준다.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줄리에게 털어놓을 때도, 조직의 강요를 받으면서도, 그는, 겁에 질린 눈을 하고는 메어 째지는 소리로 뱉는다. “그냥, 더 못하겠어.” 논리 정연한 연설이나 눈물 가득한 호소 없이 그렇게 툭 던지는 순간의 목소리, 표정, 자세, 모든 것이, 그의 진심을 깊게 설득시킨다.


<스킨>(2018) 스틸컷. IMDB.



투박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그의 연기는, 자연스럽게 화면을 휘감는다. 어색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어색하다’는 말을 ‘못한다’는 뜻으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어색함이 개성인 경우가 있어서다. 내가 매우 사랑하는 배우 아담 드라이버가 그 예다. 물론 이 어색함과, 앞에서 사용한 정말 ‘어색한’ 어색함은 다르다.) 천재라는 단어는, 이 예술가를 다 담지 못한다. 뭐, 몇몇 배우들이 그렇듯, 그 또한 스스로의 대단함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Robert Pattinson: 네가 가장 뿌듯함을 느끼는 작업이 있어?

Jamie Bell: 아니. 내 작업을 보는 걸 전혀 좋아하지 않아. 유용하긴 하지, 왜냐면 했다고 여겼던 실수를 확인할 수 있고, 어떤 선택들이 딱 내가 원했던 방향대로 작용하지 않았는지도 볼 수 있어. 그러나 동시에, 그건 매우 고문이기도 해, 이게 최종 결과물인 거잖아. 아무것도 할 수 없지. 그러니까 그걸 다시 보는 게, 의미 없어지는 거야. 내가 스크린 앞에 앉아 있게 하려면, 날 바닥에 때려눕혀야만 할 거야. 그냥 절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아직 일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그렇지만 단 하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어, “이게 내 최고의 성과야. 이게 내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야.” 내겐 매우 힘든 일이지.
(중략)
난 항상 스스로 즐겨! 나 진짜 열심히 일하거든. 언제든 세트에 있을 때면, 항상 최선을 다해. 모든 걸 갈아 넣어. 정말로 그 과정이 즐거워. 단지 그 결과물이 나오면, 맨날 이러지, “오, 신이시여.” 별안간 아주 회의적이 돼버려.

[interviewmagazine.com]



절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미 완벽했던 연기가 끝을 모르고 풍부하고 다양하게 깊어지는 까닭 중 하나일까. 어린 나이에 갑자기 유명세를 얻은 후 분명 압박과 부담을 잔뜩 받았을 텐데, 그는 건강하게 ‘성장’했으며, 아직도 실력과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 그 핵심은 항상 한결같이, 스스로 하는 일을 즐긴다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는 데에, 그리고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듯하다.  


R: 누군가 네게 해 준 최고의 조언이 뭐야?

J: 아마, 항상 자기 자신이 되라는 거. 난 모든 순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제이미unashamedly Jamie야. 내 생각에 분명히 그게 날 도운 것 같아,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 있어서도 -커리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제정신을 유지하고, 특히 그렇게 어릴 때 모든 걸 시작했을 때. 인터뷰에서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 “어떻게 당신은 그렇지 않을 수 있지, 그 있잖아-

R: 미치지 않을 수 있냐고crazy?

J: “재활원에 있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냐고?” 어쩌면 그래야 했을지도 몰라. 어린 배우들이 빠지는 함정들….. 어릴 때 내게 그게 파고들었어: “넌 네가 되어야만 해, 그리고 넌 너의 최고의 버전이어야만 해.” 내 스스로 되뇌었던 주문은, “누군가 아무리 많이 네게 공을 던져도, 네가 항상 그걸 치면, 결국엔 그중 하나는 연결될 거야.” 나 자신이 되는 것, 그리고 지속성, 은 두 가지 내가 날마다 외는 주문 같은 게 됐었지, 아마도.

R: 왜 스스로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해? (둘 다 웃음) 아니, 너 약간 미쳤잖아. 이건 배우들이 갖지 않기 힘든 이상한 특징인데, 그중 대부분은 겸손하지 않지. 넌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겸손한 사람들 중 한 명이야. 보통은 그렇지 않거든.

J: 글쎄 잘 모르겠네. 내 생각에 내 내면의 악마들은 내 악마 들이고 my demons are my demons, 우리 모두 갖고 있고, 그걸 바탕으로 연기해 내는 거야. 난 항상 사람들로부터 감명을 받아. 다른 사람들이 내가 예상했던 것만큼 미치지 않았단 것에, 더 단단하다는 것에, 더 인간적이라는 것에. 항상 사람들에게 놀라곤 해.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멍청이가 쉽게 돼서는, 시간이나 관심을 아무것에도 주지 않는 이들을 볼 때, 난 항상 겸허하고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 왜냐면 그건 대단한 특징이거든. 나도 그래야겠다는 걸 떠올려.

[interviewmagazine.com]


 
그의 연기를 훑은 후, 친구이기도 한 배우 로버트 패틴슨과 한 인터뷰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제이미 벨은 사랑스러울 것 같다. 내가 앞 문장을 적은 것은 빌리의 이미지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겠다. 물론 <빌리 엘리어트>와, 그 속에서 ‘날아다녔던’ 제이미 벨을 사랑하지만, 내가 한때 그랬듯 아직도 이 배우를 빌리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실제로 구글에 ‘Jamie Bell’을 검색하면, ‘What happened to Jamie Bell?’, ‘Is Jamie Bell still acting?’ 같은 검색어들이 함께 뜬다. 그를 빌리로만 기억하는, 그를 ‘잘 모르는’ 일부 사람들의 단순 궁금증이겠으나, 괜히 내가 다 기분이 상한다. 허나 이들도, 그가 ‘아직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작품들을 보게 된다면, ‘지금의 제이미 벨’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름스타 인 리버풀>(2017)




* 참고 인터뷰:

https://www.interviewmagazine.com/film/jamie-bell


* 인터뷰 전문 해석:

https://blog.naver.com/yonnu/221886919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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